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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KLO부대 한국인 사령관의 파란만장 일대기

(다인미디어 출판 / 1999년 발행)

 

*표지 : 계인주 약력 소개, 평북 출생 / 만주 군관학교 졸업(4기) / 만주국 일본대사관 무관 / 수원 양주 성동 동대문 경찰서장 /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겸 HID대장(대령) / 인천 영흥도 작전대장 / 팔미도 등대 등화 성공 / 미국대통령 최고훈장 받음 / KLO부대 한인사령관 / 1998년 사망

 

계선배는 일본이 패망할 때 만주국 육군중좌(중령)였다. ... (중략)... 계선배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해냈다. 그후 계선배는 적진후방에 침투해 정보수집 및 후방교란 인무 등을 수행했던 KLO부대 초대 한국인 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은 계선배를 탈영병으로 취급했다.(19~20쪽, 백선엽 추천사 중) 

 

어렸을 적에 나는 일본사람이라면 무조건 미워했다. 아버지는 일본 경찰과 헌병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혈혈단신이 된 나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우리 조선이 독립이 되고 강해져야 한다는 걸 가슴 깊이 새기고... (22~23쪽. 만주국 육군 중좌 출신의 회고록임을 감안)

 

수주 후 6.25가 터졌다. 참모총장은 나를 김포방면 사령관으로 발령을 냈다. 김포 현지에 도착해보니 정보학교 장병 10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 실상을 보고했더니 우병옥 중령이 사령관 임명을 받고 1개 중대를 인솔하고 김포 현지에 왔다. 자연 나와 교대했고 나는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그런데 김백일 지휘관이 나에게 다시 김포로 가서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김포에는 내 부하들이 없고 이제 김포사령관은 우병옥 중령인데 내가 뭣하러 가겠냐"고 말하자, 그럼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중략)... 나는 후방부대로 가라고 해 대구로 갔으나 며칠 후 부산으로 가라고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나는 채병덕 후방사령관과 통역장교인 이수영 씨와 같이 부산에 왔다.(38~39쪽)

 

그후 나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7월 중순 동경에 와서 8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머물렀다. 8월 중순 하네다를 거쳐 고꾸라에서 영국 구축함에 승선하였다. 구축함을 타고 서해 영흥도에서 상륙을 위한 첩보작전에 임했다. 이런 작전을 수행 중에 있는 나를 신장관은 행방불명으로 취급하여 파면시켰다.(40쪽, 100여 명 주민이 학살당한 영흥도 사건 관련 증언)

 

... 소만 국경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개전하게 되면 시베리아에 있는 철도를 폭파시키려고 별도로 돌격대를 편성했다. 그 특수 돌격대를 만군으로 충당시키려고 만군의 정예부대를 헌병훈련처와 명월구에 있는 조선인부대인 특수부대를 지목했다. 그때 일본 관동군은 헌병훈련처 소속인 나와 정일권을 선발했다. 특수대에서는 김백일과 최남곤이 뽑혔다. 그리고 만주인은 한 명도 없었다.(102쪽)

 

하루는 HID 정경실장 고성훈이가 심상치 않은 보고가 있다며 내방에 급히 들어왔다. "이거 대한민국이 큰일 났습니다"하는 것이었다.  ... 그제서야 고성훈은 "국방장관 신성모는 빨개이 입니다"하는 것이었다. ... 그런데 이 과부가 신성모 장관 심부름으로 이북 이극노와 세 번이나 연락을 취했다는 첩보였다.(142~143쪽)

 

그러다가 얼마 후 내 직위를 박탈하고 전보발령을 냈다. 고등군사반 입교와 아울러 정보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다. 그때 고등군사반은 경비대시대부터 있었던 고급장교들의 재교육 제도였는데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령이 명령인 만큼 시흥의 보병학교에 위치한 고등군사반에 나갔다. 그런데 2주도 못돼 6.25가 발발했다.(145쪽)

 

 그 며칠 후 육군본부는 나를 김포방면 사령관으로 발령을 냈다. 김포비행장으로 갔더니, 병력이라고는 정보학교 요원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 그런데 김백일이 병력은 보내지 않고 5~6명의 장교들을 나한테 보낸 행동이 수상쩍었다. 이들 5~6명은 김백일의 지령을 받고 나를 암살하러 온 것 같았기때문에 나는 몹시 긴장했고 이들에게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 나는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기를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본부에 최전선으로 시찰간다고 말하고 운전병만 데리고 임진강쪽으로 달렸다.(146~147쪽)

 

 그가 나를 사지로 몰아 넣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육군본부는 수원에 있었다. 나는 김백일과 상의하지 않고 수원으로 가서 채병덕 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런데 채총장은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고 횡설수설했다.(149쪽)

 

 육군본부가 어느새 대전으로 와 있었다. 그때 참모총장은 채장군이 아닌 정일권으로 바뀌었다. ... 그러면 "채장군한테 가시오"하는 것이었다. 채병덕 장군은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후방부대 사령관으로 밀려났다. 그 위치는 대구였다. 후방부대사령부는 채병덕 장군과 나와 이수영 소령뿐이었다. ... 채장군이 참모총장 시절에 타던 고급 승용차편으로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150쪽)

 

 그 이튿날 새벽 2시 사세보 부두로 나가 영국 구축함을 탔다. ... 이때 8군에서는 첩보요원으로 30명을 뽑아 이 영국 구축함에 태웠으며, 이 구축함은 사세보를 등지고 인천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 영국 구축함은 어느 새 인천 앞바다에 왔다. 영흥도에 상륙키 위해 한국 해군 702호(함장 이성우 중령)로 갈아탔다.(157~158쪽)

 

이 같은 무법 불법행위가 심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KLO놈들을 다 포살하라"고 까지 하여 신문 가십에 나왔다.(171쪽)

 

 미 합중국 대통령은 1942년 7월 20일에 제정된 법령에 의해 대한민국 육군 계인주 대령에게 특별한 임무수행에 있어 특출한 공헌을 한데 대해 공로훈장 <디그리 오브 리져네어(degree of legionnaire)>를 수여했다.(244쪽. legionnaire는 용병부대원을 의미하므로 이 공로훈장은 미국의 용병부대원에게 주는 것으로 보인다.)

 

팔미도 탈환작전의 개요를 요약하면, 50년 8월 17일 북괴점령의 팔미도 등대를 탈환키 위해 인근 영흥도에 전방기지를 설치하고 KLO부대에 특명이 하달되면서 대원 22명이 파견되었다. ... 6명(미국인 3명, 한국인 3명)으로 특공대를 ㅗ직하고 클라크 해군 대위 지휘하에 9월 14일 밤 10시 인민군과의 격전 끝에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251~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