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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 예비된 학살

1950년 9월 7일 미 합동참모본부와 맥아더는 반격을 통해 인민군 전력을 분쇄하는데 동의했으며, 그 후의 군사작전은 38선 남북 양쪽의 도시와 깊은 산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미군보다는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투방식은 한국전쟁 발발 전의 군경토벌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결국 내전의 특성을 확대시켜 부역혐의자 등 민간인 피해가 확대될 것이 분명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한편,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국민들이 적극적인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20일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까지의 우리 전략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민들의 투지를 자극하는 대신 2~3일 안에 지원병과 보급품이 도착하는 즉시 유엔군이 전면적인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무지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안심한 국민들은 스스로 국토방위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초기 패전의 희생양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에 피난하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는 국회의원들의 의결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택상은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하였다. 이에 해공과 죽산과 내가 도지사 관저로 이박사를 찾아가 그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간곡히 청했으나 ‘어디 내가 당 덕종이야?’ …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를 할테면 당신들이나 해요’라고하며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가는 것이었다.”라고 했으며 그 뒤로도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했다는 말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부산에서 피난하던 1950년 9월 16일 이승만은 전시 하 범법자는 공개 총살할 것이라는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대국민 협박에 다름 아니었고, 사정이 이러하니 일반 범죄보다 훨씬 무거운 죄로 취급하였던 부역혐의자에 대한 불법 총살행위는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어 9월 18일 서울 수복 후 방침에 대해 김장관은 “괴뢰 아부자는 단호히 처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22일 이승만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살기위해 부득이 그들 공비들에게 협력한 자가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하여 정부로서는 그 진상을 조사케 한 다음 공론에 의해서 선처할 작정이다. 특히 표면으로는 공산도배와 연락하는 따위의 박쥐 노릇을 한 자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붕당무리들은 단연코 허용치 않을 것이다. …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간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토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증명은 없고 형벌만 가혹할 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1950년 11월 연설에서 “구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대란이 나서 인명이 많이 상하고 또 전국적으로 파괴가 다대하게 된 후에는 임금이나 정부에서 민간에 사죄하기를 이것이 다 당국의 잘못이오 덕이 부족한 죄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표시하는 전례가 있었으나 민주국가에서는 이러한 부패하고 허위적인 형식상 습관은 다 폐지하고 사실만을 존중하는 터이므로 구식에 젖은 분들은 혹 섭섭히 여길 일도 없지 않으나 우리는 신세계 신생활을 주장하는 민주정체하에서 과겸과실(過謙過失)하는 허식은 피하기로 주장하는 바이니 일반 민중들은 이 정신을 양해하기 바라는 바입니다. … 또 불평분자들과 파당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 이런 것을 이용해 가지고 허무한 부언(浮言)을 조작하여 인심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일반 국민은 이남 이북을 막론하고 이러한 선전분자의 파동을 받지 말고 오직 일심합력하여 정신상 통일을 극력 추진시킴으로서 민심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영원한 복리의 기초를 완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전쟁 발발이 부른 비극적 결과에 대해 봉건시대의 구습이고 허식이므로 사과하지 않겠고, 부역자는 물론 남북을 막론한 반대세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은 미군의 보고서에도 확인된다.

남한의 경찰은 남한 주민의 80% 가까이가 북한의 공격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충성심은 분명히 부차적인 관심사이며, 주민들은 이기는 쪽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더 많다.

부역혐의에 대해 당시 국군 제1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은 자신의 부하조차도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살아있었다면 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랑포에서 나는 뜻 밖의 사건을 맞이하게 됐다. 그것은 임진강 전투에서 남하하지 못해 서울에 잔류했던 장병들 1백여 명이 부대를 찾아 이곳에 ‘지각 합류’한 것이었다. 일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감스러운 심정이 있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한강을 건너 탈출하지 못한 각자의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이나 특히 장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본대에 합류했어야 했다. 일부 참모들도 이들이 탈출하지 못한 경위와 부역 사실 여부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는 물론 파주 김포전선 방어를 포기하므로서 영등포전선이 붕괴하고 인민군 남하를 허용한 책임을 결코 인정한 적도, 책임을 진 적도 없는 그가 한 말이다. 마치 천안함 함장이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는 당당한 모습과 똑 같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수복하던 국군이 부역했음직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9․28 수복 직전의 부역자 파악이 있었다. 합동수사본부 검사였던 오제도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8월 부산에서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할 경우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관계자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미군 역시 유엔군의 수복을 앞두고 부역자 처리 방안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9월 20일 441 CIC Team이 미8군 G-2에 보고한 「Counter Intelligence Target Information」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인민위원으로 이승엽(서울시 인민위원장), 조소항, 김규식, 여운홍 등 전 국회의원, 한신, 송호성 등 국군 장군, 김효석 전 내무부장관 등 38명을 체포대상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1950년 9월 30일 「Counter Intelligence Target Information」에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이남 전 지역의 인민위원 379명의 명단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보고된 인물들 중 경기도 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은 박형병, 김경, 홍승우, 박지명이었며, 고양군 인민위원은 박일, 이종원, 최영원이었다. 김포군 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은 어수갑, 이화영이었는데 어수갑은 1950년 10월 23일 이무영 고양경찰서장에 의해 직접 총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정굴 사건 희생자이다.

1950년 10월 4일 「Counter Intelligence Target Information」에는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 24개 좌익계열 정당 및 대중단체의 이름과 설명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목록의 머릿말에는 “다음 좌익 조직의 구성원과 지도자는 사회 안전을 위협하므로 더 조사하기 위해 체포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목록에는 정당과 농민, 노동단체 외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연맹, 민주학생연맹, 문학가동맹, 인민위원회, 국민보도연맹 등이 기재되어 있다.

2. 9․28 수복 초기 유엔군에 의한 학살과 선발대 복귀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19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해 있었다.

미 해병대 제1사단(사단장 Oliver P. Smith) 제5연대와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신현준)는 20일 도하과정에서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미 해병대 제5연대원 40여 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으면서 행주지역을 점령하였다.

능곡으로 진출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는 서울 탈환 예정 시간인 9월 25일에 맞추기 위해 Smith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서울로 급진하는 것보다 남은 잔당을 소탕하며 서울 서쪽을 돌아 북쪽인 의정부 방면에서 서울을 공략하는 것이 도강도 쉽고 적의 보충부대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유엔군의 주력은 능곡 수색을 지나 연희지역으로 진출했으며 미 해병대 일부는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의정부 쪽 전투는 9월 26일 새벽 1시 45분에 시작되었다.

고양지역에 진출한 미 해병대 등 유엔군들은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학살하였다. 신도면 용두리에 진주한 유엔군은 주민들에게 ‘누가 빨갱이냐’고 물었으며, 주민들의 지목에 따라 용두리 주민 5명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신도면 화전리에서는 치안대에 의해 리 인민위원장 황재덕 등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는데, 해병대 군인들이 나타나 ‘리 인민위원장이 누구냐’라고 물은 후 황재덕을 끌어내어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했다.

은평면 수색리 황용문은 아들이 태극단 활동을 하였음에도 자위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색리 1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국군 해병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한편 고양지역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경찰관은 유엔군 특히 미 해병대에 배속되었던 고양경찰서원들이었다. 인사기록으로 보아 이들은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에 배속되었던 경비주임 석호진 경위와 천일균 순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당시 석호진 경위를 만났다는 기록은 태극단원의 증언 등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인민군 점령기 피난하지 못하고 숨어 지냈던 송병용 순경은 수색에서 석호진 경위를 만났으며 9월 20일 경 능곡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능곡에서 치안대 활동에 가담하게 된 조병세는 주민들을 체포하여 미 CIC에 인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태극단원들은 1950년 9월 28일경 석호진 경위가 미해병대 임시장교의 신분으로 경찰의 복귀전까지 태극단원에게 일산지역의 치안권을 넘겼다고 한다. 석호진의 신분에 대해 『태극단투쟁사』에는 해병대 임시장교라고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양․파주 일원의 치안유지에 심혈을 다하는 가운데 미해병대 임시장교인 석호진 중위가 일산에 와서 일산주민을 모아 놓고 하는 말이 한국경찰이 돌아올 때까지 이 지역 치안유지는 태극단에 위임하니 주민들이 갖고 있는 무기가 있으면 곧바로 태극단으로 반납하라는 훈시를 내렸고, 5일후 고양경찰서가 복귀됨에 따라 가두어 두었던 빨치산 20여 명과 극렬분자 70여 명을 인계하였음."

9월 20일경 석호진, 송병용 등 경찰관들에 의해 능곡에서 조직된 치안대, 태극단원들은 28일경 유엔군과 함께 일산으로 진입하여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는 등 치안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2일 중면 치안대 감찰차장 강흥환 등은 40여 명의 주민을 체포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보아 석호진 경위 등 미 해병대와 함께 고양지역에 진주했던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들 일부가 인공치하에서 잔류하고 있던 경찰관과 함께 치안대를 조직하고 치안활동을 지휘하는 선발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금정굴 사건 - 고양경찰서 직접 지휘에 의한 민간인 학살

1) 치안대, 의용경찰대, 태극단의 주민 연행

유엔군이 1950년 9월 20일경 한강을 건너 행주를 점령하자 황인수 등 잔류 경찰관, 태극단원이 행주지역의 부역혐의자 100여 명을 체포하여 유엔군에 넘겼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부역혐의자들이 진주하던 유엔군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유엔군이 행주리에 진주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양군에서 그 동안 숨어 지냈던 군인․경찰․대한청년단․태극단원이 석호진 경위 등 미 해병대에 파견된 경찰관의 지휘 아래 능곡과 수색지역에 모여 치안대를 조직하여 부역혐의자를 연행하는 등의 치안활동을 하였다. 잔류 경찰관 송병용은 미 해병대에 배속되어 진주한 석호진 경위를 만나고 능곡지역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태극단원과 함께 부역자를 체포하였다. 당시 일산리 이봉린, 김석권, 이기철 등 고양군 각 지역의 주민들이 유엔군을 환영하기 위해 능곡역으로 왔다가 이를 알아 본 치안대에게 연행되었다. 수색리에서는 태극단원들도 치안대 완장을 두르고 치안대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능곡에서 조직된 치안대원들은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고양군 대부분 지역을 수복함에 따라 각자 자기 지역으로 돌아와 치안활동을 하였다. 일산리에서는 조병태 외 12명이 경찰이 공식적으로 복귀하기 전, 중면치안대를 조직하여 부역자 7명을 체포해서 능곡에 있던 미군 CIC에 넘겼다고 한다. 이후 사찰주임 등 부역자 처리의 실질적 책임자들이 복귀한 10월 6일경까지 치안대에 의해 고양경찰서 유치장과 양곡창고로 연행된 주민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10월 5일경부터 치안대로 활동한 이은칠은 70여 명이 치안대에 의해 잡혀 있는 모습을 봤다고 하며, 10월 2일경 귀향한 강흥환은 고양군 중면치안대를 조직하고 감찰차장으로 활동하면서 4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중면 각리에서 잡혀 중면 치안대에게 넘겨진 부역자들이 40여 명이었다고 하였다.

중면 치안대는 10월 6일 사찰주임 이영근 경위의 지시에 의해 의용경찰대로 개편되었으며, 취조반, 사찰심사반 등의 부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개편 당시 의용경찰대 수사반원은 최상순, 차계원, 엄진섭, 강흥환, 피원용, 최상철, 이영환, 김완배, 양재남, 최명진, 이영식, 김효은, 이진 등 13명이었으며, 정보 책임자는 전 대한청년단 경기도본부 단부 간부였던 김완배였다. 의용경찰대원들은 김완배와 사찰계 경찰이 작성한 명부에 따라 주민들을 체포했는데, 체포명령은 고양경찰서장이 내렸다.

의용경찰대 사찰심사반 제1반책임자였던 강흥환은 10월 6일경 각리 구장이나 반장들이 가져온 정보에 의해 주민들을 체포하여 왔는데 제1반에서 검거한 주민들이 약 15명이었다. 이은칠에 따르면, 피난에서 돌아 온 경찰 등은 인민군 점령기 주민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지 못하므로 주로 지하공작을 하고 있던 태극단원과 우익청년들의 정보제공에 의해서 검거했는데, 10월 20일경에 인민위원회원 등 명부가 발견되어서 이에 의하여 검거하였다는 말도 있었다.

소극적인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은 예상되는 위협을 피해 피신하던 중에 연행당하기도 하였으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자기로 인해 괴롭힘을 당할 일을 예상하여 자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집에 있다가 연행당했다.

연행당한 주민들은 1차로 거주지 가까운 곳의 지서나 치안대사무실, 임시 유치시설에 감금되어 있다가 지서소속 경찰관 또는 치안대의 임의적 조사과정을 거쳐 고양경찰서 유치장으로 인계되었다. 경찰 측에서는 임의로 감금당한 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이들은 가족들이 가져오는 식사로 끼니를 대신하였다.

1950년 9월 20일경부터 능곡․행주 지역에서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은 먼저 능곡지서로 끌려갔다. 능곡지서에는 유엔군의 진주를 환영하기 위해 능곡국민학교, 능곡역으로 왔던 주민들 중 부역혐의를 받던 일산리 이봉린, 김석권 등이 연행당했다.

10월 2일경 중면 치안대 감찰차장 강흥환 등은 40여 명의 주민을 체포했으며, 의용경찰대 조병세는 10월 초순 치안대장 이학동의 명령에 의하여 일산리 정영학, 김영한을 체포하였다. 10월 5일 일산리 동곡마을 구장이었던 이규봉은 태극단원들에게 연행되어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으며, 10월 6일경 치안대원 중 4명이 부역혐의로 검거되었다가 3명은 석방되었으나 1명은 석방되지 못했다.

10월 10일경 중면 마두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최의현, 일산리 윤영규는 고양경찰서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 피원용, 조병세에게 연행되었다.

행주의 이금현은 부역혐의자의 가족으로서 비교적 늦은 시기인 10월 15일경 공회당에서 부역혐의자의 행방을 추궁하는 고문을 당하다가 능곡지서로 연행되었다. 신평리의 이병희도 공회당을 거쳐 능곡지서로 끌려갔다.

송포면 가좌리 김용남, 대화리 이돌섭, 덕이리 안점봉, 법곶리 심재천, 구산리 김영선, 전옥자 등은 1차로 송포지서에 감금되었으며 그 후 다시 고양경찰서로 끌려갔다. 송포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환영행사에 참석한 법곶리 노인성, 노춘석 등은 가좌리 중산말 석유창고로 끌려갔다. 송포지서에 갇힌 주민들은 경찰과 치안대원들에게 총알을 손가락사이에 낀 후 발로 밟는 고문을 당했다. 덕이리 창고로 끌려간 안봉이는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치안대 최범쇠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으며 다음 날에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덕이리 창고에 함께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은 30~40명 정도였다. 송포면 법곶리 심기만은 1차로 도촌치안대 사무실로 끌려갔다가 송포지서를 거쳐 고양경찰서로 갔다. 일산과 가까운 덕이리 김영환, 장항리 박근식과 일산리 서상용 등은 바로 고양경찰서 유치장이나 임시유치창고에 감금되었다.

2) 고양경찰서의 감금, 취조, 고문, 분류

각 지서에서 1차 조사를 받은 주민들은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고양경찰서에는 매일 15명가량의 마을 주민들이 고양경찰서로 연행되거나 이송되었는데, 10월 10일경에는 송포지서에 잡혀있던 있는 주민 101명이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어 왔다.

고양경찰서에는 4개의 유치장이 있었으며, 경찰서 앞 양곡창고를 임시유치시설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4개의 유치장에는 8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으며, 양곡창고에는 18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의용경찰대원 조병태에 따르면 주민들 중 10월 27일까지 검찰청으로 이송된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의 연행자들은 고양경찰서에서 3~7일 동안 갇혀 취조 명목의 고문을 당했다. 덕이리 희생자 김진홍은 대소변을 볼 때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고양경찰서에서 이틀 동안 감금당했던 임서북은 뺨을 맞는 등 고문을 당했으며 감금된 주민들이 마실 것이 없어 자기 오줌을 먹는 모습과 경찰서 맞은 편 유치창고에서 치안대가 잡혀 오는 사람을 총 개머리판이나 장작개비로 무조건 때리고 집어넣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유치장 담당 순경 정준섭은 마실 물이 없어 오줌을 마시는 모습과 남녀 구별 없이 7~8명 들어가는 유치장에 20여 명을 넣어 여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모습, 아침 점검 때 마다 고문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였다.

조사는 주로 사찰계 소속 경찰들이 하였고, 조사결과는 진술서로 작성되었다. 유치장에는 유치인들을 관리하는 명부가 있었는데, 유치장 담당 경찰관이었던 정준섭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여자 남자를 구별 않고 7~8명 들어갈 곳에 한 20여 명을 때려 넣은 거야. 여자들은 오줌도 서서 싸는 거야. 오줌을 마시는 것도 봤어. 오죽 목이 타면 그래. (그 후)유치장이 꽉 차니까 창고에 넣었어. 그냥 와글와글 했어. 매일 아침 점검을 해야지. “아무게 아무게” 하면, 다 죽어가는 대답으로 ‘네~’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점검하는데 두 서너 시간 걸려. (고양경찰서에서는 주민들에게) 밥을 안 주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줘. 잡혀간 사람들이 밥을 해 와. (밥을) 죽 늘어 놓는데, 갇혀 있는 사람들 서너명을 데리고 나와 가지고 들어가. 이걸 배식해 줘야 해요. 밥 속에 속내의 넣는 사람, 양말 넣는 사람들도 있고, 밥 속에다 뭘 써서 넣은 사람도 있고. ‘잘 있느냐’, ‘너만 잘 있어라.’ 이런 건 전해주지 않았어요.“

당시 고양경찰서에 끌려갔다가 조사 후 풀려난 사람으로 신평리 희생자 이병희와 같은 마을 주민 유해응, 법곶리 희생자 유배근과 같은 마을 주민 김정운, 일산리 희생자 서상용의 처 임서북, 구산리 희생자 김영선의 아들 전왈성이 있었다. 그런데 임산부여서 풀려난 임서북 외에 유해응, 김정운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이 경찰서에서 어떠한 조사를 받았으며 어떻게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유족 전왈성은 대한청년단 이학동에 의해 금정굴에서의 희생직전에 풀려났는데 이는 단지 이학동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유때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고양경찰서 사찰계는 의용경찰대 취조반원 이계득, 방규순의 도움을 받아 취조한 결과 A, B, C로 등급 분류하여 A급은 총살, B급은 유치, C급은 석방했다.

3) 금정굴 학살

고양경찰서는 사찰계의 취조 결과 A등급으로 판단한 주민들을 금정굴에서 학살했다. 학살은 사찰계 소속 경찰관과 사찰주임이 복귀한 10월 6일부터 시작되어 10월 25일까지 저질러진 것으로 판단된다.
유치장 담당 경찰관이었던 정준섭에 따르면, A등급으로 분류되어 학살 대상자가 된 주민들을 유치장에서 끌고나가는 것부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명부라고 부른 ‘부역자 명부’에 서장, 교무과장, 수사과장의 도장이 찍혀야 주민들을 내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유치시설에서 끌려 나간 주민들은 작게는 5명에서 많게는 47명까지 고양경찰서 앞 공터에서 2인 또는 1인의 양 팔을 통신선(일명 비비선)에 묶인 채 경찰관, 태극단, 의용경찰대의 감시 아래 금정굴로 향했다.

금정굴은 고양경찰서에서 약 2Km 떨어진 야산이었으므로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거리가 가장 짧은 일산시장 관통로를 지나 갔는데,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많아지자 그 다음부터는 목격자가 적은 철길로 우회하였다. 나중에는 트럭을 이용하여 금정굴 현장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금정굴에 도착한 주민들은 태극단과 의용경찰대원의 감시아래 현장 아래 공터에 집결되어 있었으며, 경찰의 지시에 따라 5~7명씩 학살 현장으로 불려 올라갔다.

금정굴 학살현장에서는 먼저 도착한 5~7명의 경찰, 의용경찰대, 태극단원이 학살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올라온 주민들을 1명씩 각각 분담하여 입구에 앉혀 놓고 M1총 또는 칼빈총으로 1미터정도 뒤에서 총을 쏘아 학살하였다. 총살은 1회에 5명 내지 7명씩 하였으며 처음에는 총을 쏘아 굴로 바로 떨어뜨렸으나 생존자가 발생하자 굴 입구에서 총살한 후 굴속에 던져 넣는 방식으로 바꿨다.

학살은 20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태극단원 60여 명이 번갈아 가며 교대로 가담하였다. 각 개인들은 1회부터 4회까지 학살에 가담한 결과 200여 명을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분산되었으며, 계엄 상황 아래 고양경찰서장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므로 일부 가담자들은 전혀 범죄행위였음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진은 “의용경찰대원으로 경찰에 협력하게 되자 고양경찰서 사찰주임 명령에 의해서 인민군에게 협력하였다는 군민을 3회에 걸쳐 60여 명을 총살시킨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총살에 직접 가담했던 의용경찰대원 이광희는 고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3회 금정굴 학살을 목격하였고, 1회는 직접 가담했다고 하였다. 치안대원 김규용은 1995년 10월 3일 방영된 MBC TV 『PD 수첩』에서 “사람을 한번 죽이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또 죽이고 덮고 여러 켜로 덮었다”라고 증언했으며, 같은 프로그램에서 태극단원 김인성은 “무차별로 처단하는 것을 보고 나는 태극단에서 나왔다”고 증언했다. 한편, 1999년 10월 14일 경기도의회에서 이장복은 “태극단은 부역자 연행과정에 1회 참여했을 뿐 어떠한 학살에도 가담한 일이 없고, 법치주의 국가이념에 따라 체포한 부역자들을 적법하게 인도하기만 했다. 또 금정굴 사건 발발 이전에 군 입대 지원을 위해 태극단원은 일산을 모두 떠나 있었다. 치안대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라고 하며 태극단의 학살 가담사실을 부인했다.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금정굴에서 있었던 학살사건을 일자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0월 6일>

학살은 10월 6일부터 시작되었다.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1회에 15명에서 30명까지 3회에 걸쳐서 50여 명이 사찰계 형사에게 불려나가 모두 총살당했다. 의용경찰대원 강신원은 국군 수복 후 중면 치안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복귀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부역혐의를 받고 10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구금되어 있으면서 50여 명의 주민이 끌려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10월 7일>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김○○, 김영규 외 12명의 주민들이 고양경찰서원들에 의해 CIC로 넘긴다며 벽제지서로 이송하던 중 김○○, 김영규를 제외한 12명 일행이 어디에선가 희생되었다. 고양경찰서에서 벽제지서로 가는 도중 금정굴이 있는데, 이로 보아 이들 12명의 주민들도 금정굴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희생 장소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0월 8일>

오후 6시경 검거 중이던 주민들 일부가 치안대원과 태극단원들에게  학살당했다. 이 사실은 송병용 순경이 10월 9일 오전에 동료 경찰관들로부터 들었다.

<10월 9일>

고양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김석권 외 46명이 오전 11시경 끌려나와 고양경찰서 사찰계 경찰관, 태극단원, 의용경찰대원 등 20여 명에 의해 양손을 뒷쪽으로 묶인 채 신작로를 통해 걸어서 감내고개 금정굴(숙고개 뒷산)로 끌려 가 학살당했다. 의용경찰대에서는 강흥환, 김이성, 양재남, 이광희, 이영환, 이진, 조병태 등이 학살에 가담하였다. 양재남은 이진이 가자고 하여 금정굴까지 갔으나 주변 경비만 했을 뿐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고양경찰서에서는 사찰계 김한동 경사, 송병용 순경이 가담하였다. 의용경찰대원들이 이 날 목격한 희생자들은 김석권, 박상하, 박중원(박상하의 부친), 안희준, 임종태, 이경학, 이기봉, 이기봉 딸, 이영창, 이종안 모친이었으며, 유족들이 목격한 희생자들은 김석권, 이봉린 등이었다.

1950년 10월 9일 아침 이순창 등 태극단원들은 조성구 부단장에 의해 집합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장복은 “서장이 나한테 요구하기를 부역자들이 너무 많아서 문산경찰서로 이동을 시켜야 하는데 경찰병력이 약하니까 태극단이 호송을 맡아 달라”고 훈시를 하였다. 당시 남아있던 태극단원들 20여 명 대부분이 호송작업에 동원되었다.

유족 서병규는 아침 밥을 전달하려고 갔다가 부친 서상용을 비롯한 희생자들이 양곡창고에서 끌려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끌려나온 희생자들은 나오는 즉시 양팔을 뒤로 묶이고 있었다. 그 후 서병규는 정오경 금정굴 방향에서 총소리를 듣게 되었다. 잠시 후 부근에 살던 오촌 당숙 서상준이 와서 아침에 끌려간 사람 모두가 금정굴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고양경찰서에서 끌려나온 희생자들이 봉일천 방향으로 끌려가는 모습은 희생자 김석권의 부친 김상용도 목격하였다. 김상용은 금정굴로 끌려가는 희생자들을 뒤따라갔으며 금정굴의 건너편 산인 고봉산 중턱에서 학살현장을 목격하였다.

희생자들이 끌려가던 길가에 집이 있었던 이병순 역시 연행 행렬의 마지막에 있던 부친 이봉린을 목격하였다. 이들을 호송하던 태극단원, 치안대원, 경찰은 M1총을 메고 총 끝에 태극기를 묶고 있었다. 경찰들은 유엔군복을 입고 있었고, 치안대원들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이미 몇 명의 경찰관들이 금정굴 현장에서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이송 행렬이 산 중턱에 도착하자 산 위의 경찰들이 산 중턱의 경찰과 태극단원들에게 주민들을 다섯 명씩 끌고 올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경찰은 끌려 온 주민 다섯 명을 수직굴인 금정굴 벼랑에 입구를 바라보며 꿇어앉힌 후 다섯 명의 경찰관이 뒤에서 이들의 머리 등에 조준 사격을 가했다. 양손이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의 충격에 의해 17미터 깊이의 굴 안으로 떨어졌다. 두 명의 손목이 함께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이 없었어도 총격을 당한 희생자와 함께 떨어졌고, 어떤 이들은 총소리만으로도 놀라 떨어지기도 했다. 그 후 경찰과 태극단은 금정굴 속으로 흙을 뿌려 희생자들의 시신을 덮었다. 총격에 의해서였든, 떨어진 충격에서든 목숨을 잃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 날 이경선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 이런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날 금정굴 학살현장에 있었던 태극단원 이순창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래서 금정굴에 갔는데, 나는 지리를 모르잖아. 산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문산 가려면 금촌 지나서 가야 하는데 얼마 가다가 이쪽으로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나는 문산 길이 이쪽으로 있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산이 있고 이렇게 산이 있었어. 계곡으로 들어간 거야. 전부 앉혀놨어. 우리는 총 메고 있고. 겨냥할 것도 없지. 가지고 다니는 거니까. 경찰이 먼저 올라갔었던 가봐. 누가 내려오더니 경찰이 다섯 명 데리고 올라오라고. 태극단원들도 몇 올라오라고. 나도 쫒아 올라갔어. 태극단원도 몇 사람 올라갔어. (올라갔더니 경찰이 희생자들에게) “하나 둘 셋 넷 다섯. 꿇어 앉어!” 그러더니 경찰관들이 등 뒤에서 쐈거든. 우리는 깜짝 놀랐거든. 문산으로 보낸다더니 여기서 사람을 죽이는구나. 그 때 당시 빨갱이는 당연히 죽는 걸로 알았어. 그래서 여기서 살상을 다 해버렸다고. 현장까지 갔으니까. 내 눈으로 봤으니까. 전화선. 밧줄로 엮어. 확실히는 모르겠어. 밧줄은 썩어 없겠지. 삐삐선만 남았겠지."

47명을 총살한 경찰관, 태극단, 의용경찰대가 돌아가자, 현장을 모두 목격한 김상용이 마을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이삼린 등 희생자 이봉린의 가족 등 주민 7~8명이 마차와 밧줄을 준비해서 금정굴로 떠났다.

이들이 현장에 도착해 굴 안을 보던 중 살아 있는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나자, 이삼린과 주민 한 명이 밧줄을 타고 굴 안으로 내려가 얼굴에 총알이 스친 채 살아 있는 이경선을 꺼내 주게 되었다. 이경선은 굴 밖으로 나오자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본인을 포함해 47명이었으며, 총을 쏜 자들은 태극단, 의용경찰대, 고양경찰서원들이다. 굴 앞에 사람을 세워 놓고 총살을 하여 구덩이에 시체를 떨어뜨렸다’라고 말했다.

금정굴사건 현장까지 함께 갔던 희생자의 아들 이병순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작은 아버님과 함께 반장을 보셨던 동네 어른들 7명과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과 사다리, 마차 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 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와 동네반장 어른, 두 분이 내려가셨습니다. 두 분이 내려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경선씨입니다. 우리가 꺼내주자마자 바로 고봉산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이경선씨 사위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이경선씨는 뺨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군요. 작은아버지가 내려갔다 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흙이 조금씩 덮여 있었고요. 비록 시간은 점심때였지만 굴 안은 캄캄했고 비좁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디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어요."

<10월 12일>

주민 6명이 사찰주임의 명령 아래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의용경찰대원 이진, 강흥환, 고양경찰서 사찰계 경찰관 4명, 태극단장과 태극단원 4~5명이었다. 이 날 희생당한 주민들이 누구였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10월 13일>

주민 18~19명이 태극단원과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의용경찰대에서는 피원용 등이 학살에 가담했다. 피원용은 철도까지 경비를 했으나 학살 현장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증언과 자료에 따르면 이 날 희생된 주민은 김영환, 최의현이다.

희생자 김영환의 아들 김기조는 할미마을 철뚝 건너편(현재 일산역과 E-마트 사이)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친척으로부터, 손을 뒤로 묶인 채 끌려가던 김영환을 목격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20여 명이 경찰의 포위아래 포승줄(비비선)으로 묶여 끌려갔다. 당시 경찰이 여섯 명 정도였고 치안대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금정굴로 희생자들이 끌려가는 모습은 중산마을 약수터 인근 주민들에 의해서도 목격되었다.

중면 마두리 주민 최승윤은 1950년 10월 10일 체포당한 최의현이 13일 금정굴에서 희생되었음에도 고양경찰서에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며, 별도로 알고 지내던 민동선 순경에게 부탁하여 10월 26일에서야 최의현의 희생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10월 14일>

오전 11시경 주민 14~15명이 태극단원, 의용경찰대원, 고양경찰서 사찰계 경찰관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이 날 학살에 가담한 경찰관은 김한동, 송병용, 김종봉 외 2명이었으며, 의용경찰대원은 강금로, 피원용, 강흥환, 이진이었다.

사찰계 경찰관 송병용은 “사찰계 취조반 형사 김한동이 동행하자고 하여 60여 명을 취조한 결과 14~5명을 A급으로 판단하고 전선으로 양 손을 후방으로 붙들어 매고 부락이 있는 대로를 피하여 소(小)도로로 약 2키로미터 북쪽으로 갔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 밑에 일동을 앉히고 4, 5명씩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있는 금광굴(金鑛堀, 마치 우물같이 판 약 5, 6길 즈음 되는 굴) 옆에 앉히고 본인과 동행한 경찰관들, 태극단원들이 휴대하였던 엠1총으로 사살하고 그 시체는 굴속에 넣어 버렸다. 그때 동행했던 자들은 김종봉 등 사찰계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4~5명, 태극단원 1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이진은 “세 번째 (학살에) 가담했는데, 전 회 장소와 같이 사찰주임의 명령으로 10여 명을 총살시킨 사실이 있으며, 장소는 3회 전부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산 4번지 선산이었다. 폐금광 구덩이 입구에 앉혀 놓고 총을 쏘아 죽였다.”라고 하였다.

<10월 15일>

주민 5명이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들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이 날 학살에 가담한 경찰관은 김천옥 순경 외 1명이었으며, 의용경찰대원은 신현섭, 엄진섭, 강흥환, 김효은, 조병세였다.

이날 처음으로 학살에 가담했다는 의용경찰대원 조병세는 “경찰서에서 약 3마장 쯤 북방에 있는 광산굴에다 데리고 가니 5명을 굴 옆에 앉히고 데리고 갔던 계호원 전부가 M1 또는 칼빈총을 발사하여 죽이고 그 시체는 굴속에 넣어 버렸다“라고 하였다.

<10월 17일>

주민 26명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이 날 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는 경찰관은 송병용이며, 의용경찰대원은 이광희, 강흥환이다.

경찰관 송병용은 2회 째 가담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의용경찰대원 이광희는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산중 금광굴에서 군 내무서원 1명과 본인이 데리고 가던 자 1명 등 2명을 직접 본인이 총살한 사실이 있고 그 전에는 경비 2회에 간 사실이 있다. 강흥환 동지가 고양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지시하였다고 하며 가자고 하여 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월 18일>

파주 출신 등 5명의 주민이 사찰계 경찰관 박용길, 의용경찰대원은 이진, 최상철, 이영환, 조병태 등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희생자 중 파주출신은 야당리 채기동 뿐이므로 이 날 학살당한 파주사람은 채기동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병태는 “고양경찰서 사찰계 박용길 경사 명에 의하여 파주군 사람 등 유치인 5명을 각각 1인씩 맡아가지고 총살시켜 금광굴에 쓸어 묻은 사실이 있다. 피의자 5명 중 성명은 불상이나 한 사람은 파주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때도 본인과 이진, 최상철, 이영환, 유치장 순경 5명이 가서 전번과 같이 금광굴에다 한 사람씩 맡아 총살시키고 그 구덩이에 떨구어 버렸다. 이것은 고양경찰서 사찰계에서 명령하여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월 20일>

19명(또는 15명)의 주민들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이 모습은 태극단장 이장복의 소집으로 동원된 김영배가 고양경찰서원과 태극단원이 6~7명씩 금광굴 옆에서 총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날 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는 경찰관은 송병용 순경이며, 의용경찰대원은 피원용, 이경구 등이다. 이 날 학살당한 것으로 확인되는 주민은 이계상, 오일섭, 김규순 등이다.

태극단원 김영배는 “10월 18일 11시경 대장의 명에 의하여 동원을 당하였다. 경찰서에 와서 보니 사찰계에서 죄인 이계상, 오일섭, 김규순 외 16명을 데리고 나와서 같이 가라 하기에 뒤에서 따라갔었다. 금광구뎅이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인솔자는 경찰 송(宋)순경(송병용)이었고, 같이 따라가게 된 사람은 피원용, 이경구(李慶九)외 3, 4명이었다. 산에 올라갔더니 금광구뎅이 앞에다 앉히더니 송순경이 6인만 올라오라고 하여 6인을 올려 보내는데 나는 (총살을 대기하고 있던) 죄인 옆 한편에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 총소리가 나더니 6인을 또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안 가 봤다가 마지막에 나도 따라 가 보았다. 금광구뎅이 옆에 앉혀 놓고 총으로 쏴서 죽인 다음에 구뎅이에 넣는 것이었다. 나는 인정상 볼 수 없어 한편 쪽에 가서 총소리가 날 때 보지도 못하고 있다 총소리가 끝나자 돌아보니 죄인은 죽었던 것이다. 그래 구뎅이에다 끌어넣는 것만 좀 보구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10월 22일(또는 23일)>

북한출신 예심판사, 김포 보도연맹간사장, 전라남도 출신 민청 선전부장, 인민위원장 출신 2명의 주민들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총살에 가담한 자는 고양경찰서 유치장 이순경, 의용경찰대원 이진, 이광희, 최상철, 조병태였다. 희생자 중 김포출신으로 확인된 주민은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 출신의 어수갑이므로 이 날 희생된 김포 주민은 어수갑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지도면 신평리 희생자 이병희의 처 송기순은 “남편과 함께 끌려간 주민들이 너댓명 정도였다고 기억납니다. 그 중에는 전라도에서 와서 사는 사람이 있었어요. 유해응씨만 나오고 전라도 사람과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로보아 이병희도 이 날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월 25일>

밤중에 서병철 등 주민 20명이 고양경찰서장 이무영, 사찰주임 이영근 등 경찰관과 이진, 강흥환, 조병세, 엄진섭, 김효은 등 의용경찰대원들에 의해 트럭에 실려 금정굴로 끌려 가 학살당했다. 태극단원은 이날부터 국방부 정훈국으로 편입되었으므로 학살에 동원되지 못 했다.

이진은 “25일 총살집행에는 서장 이무영, 사찰주임 이영근도 참가하여 서장도 직접 2명을 총살하였다. 본인도 3회에 걸쳐 5, 6명을 총살하였다. 당시 총살은 고양경찰서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고 계엄령지구이니까 죽이는 것이 합법적인 줄만 믿었다. 피살자 중 내가 아는 자는 10월 25일 총살된 서병철 뿐이다“라고 하였다.

강흥환은 “피살자들 대부분은 고양군민이지만 전라도 또는 타지에서 온 자들도 섞여 있었다. 10월 25일 20명을 즉결할 때에는 서장 이무영 경감이 직접 그 중 2명을 총살했는데 그 피살자는 동 서장 식구들을 죽이고 집을 점거하고 있던 자라고 하였다. 본인이 총살한 자는 전부 5명이었다”라고 하였다.
조병세는 “제2차로 10월 25일 달밤에 피검자 20여 명을 경찰 10여 명과 의용경찰대원 엄진섭, 강흥환 및 본인 등이 자동차에 태워가지고 금광굴에 가서 사살했는데 당시 본인은 굴까지 올라가지 않고 굴 있는 산 밑에 있는 길에서 동인들을 굴 있는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 본인은 잘 보지 못했는데 그 때는 사찰주임과 서장도 동석하고 갔다는 말을 김효은과 강흥환으로부터 들었다.“라고 하였다.

조병태는 “본인이 총살한 것은 전술한 2회뿐이고 고양서 경무주임 고경위(고영준)와 김포경찰서로 압송한다고 피의자 5명을 데리고 그 방향으로 가는 곳을 보았고 이틀 전(10월 25일)에도 그 총살장소에서 야간 총성이 수십 발 났으나 동서 각 순경 말이 놀랄 필요 없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은 “나는 사찰주임 이영근 경위의 보고를 듣고 괴뢰군 시대에 활약하던 좌익분자라고 하기에 정확한 일자는 기억할 수 없으나 1차에 약 3, 40명 즉결한 사실은 있었다.“라고 했다.

금정굴에서의 집단총살장면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목격되었다.

정종만은 인민군 측에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손한영의 장례행사에 참석하던 중 금정굴 근처에서 치안대와 경찰이 열 댓 명의 주민을 끌고 와서 “아저씨들 잠깐 피해주소!”라는 말을 한 후 희생자들을 총으로 쏘아 금정굴에 집어넣는 것을 목격하였다.

금정굴사건이 진행 중인 10월 중순, 전쟁 전 능곡지서에 근무하다가 고양경찰서로 복귀한 순경 김사철은 근무 중 서너차례에 걸쳐 연행․감금된 주민들의 총살에 고양경찰서 소속 동료 경찰관들이 동원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당시 1회에 동원된 경찰관은 서너 명이었고 총살당한 주민들은 대여섯 명이었다는 말을 경찰 동료로부터 전해 들었다.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근무했던 정준섭에 따르면 그가 근무할 당시(1950년 10월 10일 이후로 추정)에는 오전에 처형하는 일은 없었으며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끌고 가서 처형했고 나중에는 차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4. 한강변사건 등 - 고양경찰서 지휘 아래 치안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고양지역에서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은 고양경찰서의 직․간접적 지휘와 감독 아래에서 희생되었다. 고양경찰서 및 경찰서장의 직접 지휘 아래 고양지역 전체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된 사건이 금정굴 사건이었다면, 고양경찰서까지 오기도 전에 각 지서가 있던 면 단위에서도 희생된 사건들이 있었다.

1) 한강변 사건

일산지역이 수복되던 1950년 9월 28일경 국군에 의해 구산리지역이 수복되자 피신 중이던 인공치하 구산리 인민위원장 피순성이 연행되었다.

1950년 10월 초순 구산리, 가좌리, 대화리에서 끌려간 주민들은 대개 송포면 가좌리 양곡창고와 대화리 양곡창고로 끌려갔다. 가좌리 창고 부근에는 가좌리 출장소와 송포(구산리)치안대 사무실이 있었으며 대화리 창고 옆에는 송포지서가 있었다. 대화리 창고는 매우 커서 20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는데 이 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 101명이 1950년 10월 10일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950년 10월 20일 김포에서 왔다는 정체불명의 치안대 세 사람이 야간 경비활동 중이던 희생자 이범인을 체포했고, 이후 이들은 이범인의 옆집에 살던 피원순을 연행했으며, 다시 내려가면서 피원기도 잡아갔다고 한다. 이들이 끌려나오는 동안 인민군점령 당시 희생당한 피백성의 동생 피인용이 보초를 보았다. 그 후, 이범인, 피원순, 피원기 세 명은 치안대에 끌려 이산포 방향으로 갔으며 그 뒤를 치안대 감찰부장 피영권이 따라갔다.

이범인의 아들 이병희(당시 16세)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한강변을 찾아다니다가 피원순의 시신을 목격하였는데, 이병희가 목격한 시신들은 총상을 당한 상태였다. 이병희의 연락을 받은 희생자 피원순의 아들인 피영배는 조부 피창손과 함께 희생자의 시신을 인근 한강변에 임시로 수습하였다.

당시 구산리 태극단원이었던 이준영은 전날 밤 총소리를 들은 후 구산리 자택 부근 한강변에서 30~40명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희생자들은 구산리 장월, 거그메, 노루메 등에서 끌려 온 부역혐의자들이었고 하며, 이들 외에도 가좌리 양곡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도 주로 한강변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변이나 강변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는데, 이는 시신유기와 범죄증거의 인멸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병희는 1950년 10월 20일 사건 직후부터 일주일동안 파주 교하읍 산남리 황마름 강변부터 고양 이산포 강변까지 200여 명에 달하는 시신을 목격하였다. 한 무더기에 40~50명씩 되는 시신이 5~6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나마 이 시신들은 희생자들의 시신 중 한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은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시신 중에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것도 있었다고 한다. 시신들은 유선줄로 양손목이 묶여 있었고 육지 쪽 풀밭에 있는 시신은 방치되어 부패한 냄새가 많이 났다고 한다. 이병희가 시신을 찾아다닌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들개들이 모여 뭘 뜯고 있어 쫓아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병희는 같은 마을의 희생자 피원순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 외에 시신 2구가 누웠다가 썰물에 떠내려간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피원순의 시신은 진흙더미에 파 묻혔기 때문에 썰물에 떠내려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희는 이범인, 피원기, 피원순 세 사람이 같은 날,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는 마을 주민들의 목격담을 근거로 썰물에 떠내려가고 남은 자리를 희생자 이범인과 피원기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피영배 일행이 피원순의 시신을 발견할 당시 들개에 의해 훼손되어 신원을 알 수 없었으나 연행당시 아들 피영배의 허리띠를 차고 있었으므로 이 허리띠를 보고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영배가 희생자의 시신으로부터 허리띠를 빼려고 하자 조부가 망자(亡子)의 물건은 빼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 피경애, 김영연은 파주 심학산에서 희생당했다. 피순성, 이범인, 피원순, 피원기 모두 농민이었는데, 피순성은 인공치하 구산리 인민위원장이었으며, 피원순이 인민위원회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범인, 피원기는 인민위원회 일을 하지 않았다. 피경애, 김영연은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피승권의 딸과 모친이다.

이들 외에도 구산리에서 임복성 가족, 홍제관 가족, 강은성 가족이 희생당했다고 하며, 같은 마을 강놈산의 가족들도 9․28 수복 후 한강 둑으로 끌려가 죽었다는 증언이 있다.

2) 새벽구덩이 사건

‘새벽구덩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 고양지역의 민간인 학살사실이 알려진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당시 12세로 국민학생이었던 희생자 안종옥은 1950년 10월 3일경 조부 안점봉과 함께 송포지서로 끌려갔는데 1950년 10월 10일 안점봉만 고양경찰서로 넘겨지고 안종옥은 송포지서에 그대로 있었다. 같은 시기 당시 16세로 중학생이었던 안종옥의 형 안종덕은 덕이리 치안대에 의해 피신해 있던 서울에서 잡혀와 송포지서로 끌려왔으며 두 사람은 송포지서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1950년 10월 20일경 지서 경찰관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풀어주었으나 다시 덕이리 치안대 유병문, 정수연에 의해 덕이리 430번지 자신들의 집에 묶여 갇히게 되었다. 당시 덕이리 430번지 가옥은 치안대가 점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음 날인 10월 21일 새벽 치안대에 의해 끌려 나가 인근 뒷산에 있던 새벽구덩이에서 희생당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들을 끌고 나간 치안대원은 정수연이었다고 한다.

희생자 안종덕, 안종옥은 송포면 덕이리에 거주하던 가족 또는 친척들이 모두 금정굴에서 희생당한 뒤 희생되었으므로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가족 중 당시 희생을 피한 유일한 생존자인 안종호는 당시 5세로서 안종덕과 함께 서울에 피해 있던 중 장독에 숨어 치안대의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안종덕, 안종옥은 좌익활동을 했던 안진노의 조카였으며 희생자들의 부친, 조부, 삼촌 등 일가족은 사건 직전 ‘고양 금정굴사건’으로 희생당했다.

3) 귀일안골 사건

1950년 10월 초순경 벽제면 치안대(대장 홍기세)에 의해 김현세 일가 5명과 박상진 가족 3명, 김용배 가족 3명 등 진밭, 잣골, 귀일안골 주민들 20여 명이 옛 성석국민학교로 끌려가 갇혀 있다가 10월 30일경 성석리 뒷골 방공호(현재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 14-4번지)에서 학살당했다.

박상진은 인민군 점령 하에서 복구대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연행되었으며, 아랫마을 반장 이각, 윗마을 반장 김용배가 함께 끌려갔다. 안골에서는 김씨 집안 장손이었던 김현모가 인민위원회 일을 보았다는 이유로 마을에 남아 있던 그의 친인척들이 모두 연행당했다.

옛 성석국민학교 교실에 감금되어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은 일주일 동안 치안대가 주는 주먹밥을 먹고 지냈으며 참고인 이각 등 일부 주민은 갇혀 있다가 풀려나오기도 하였다. 유족 박성례(朴聖禮)는 학교근처에 거주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끌려가 있던 자신의 모친 현아순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이 때 희생자 현아순은 박성례에게 본인이 배급받은 주먹밥을 먹으라고 주기도 하였다.

1950년 10월 30일경 벽제면 치안대(대장 홍기세)가 옛 성석국민학교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 20여 명을 벽제지서로 넘긴다며 끌고 가다가 귀일안골로 넘어가는 고개인 뒷골 골짜기 방공구덩이에 사살하여 암매장하였다.


<그림 7> 뒷골 방공구덩이가 있던 자리. 이각 노인이 증언해 주었다.


당시 옛 성석국민학교 아래에 살고 있었던 박성례는 옛 성석국민학교에 감금되어 있던 부친 박상진과 모친 현아순으로부터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며칠 후 교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문봉으로 넘는 고개 쪽(뒷골)에서 엄청난 총소리를 들었다.

희생자들은 대개 일가족이 몰살당했으므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고 당시 친인척조차 함께 희생당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시신수습을 위해 나설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귀일안골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은 평지가 되었으나 옛날 뒷골에 큰 봉분이 있었고 근처에 방치된 유골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을 전후하여 이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성석리 김현룡(당시 32세)은 6․25 전 금융조합연합회 양곡부 가공과 공장계 서기를 했으며, 6․25 이후 고양군 벽제면 인민위원회 재정책임으로 있었는데, 1950년 10월 7일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후 1950년 12월 14일 서울형무소에서 병사했다. 김현룡은 인민위원회 선전책임자 김현모의 동생으로 확인된다.

당시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되는 주민은 성석리 진밭에 살던 박상진, 현아순, 박성인, 성석리 귀일안골에 살던 김현세, 차제순, 김태규, 김봉규, 이해용, 성석리 잣골에 살던 김용배, 김현남, 안일례 등이다.

4) 주엽리 하천사건

중면 장항리에 살던 한일성(당시 20세), 한효수(당시 21세) 외 주엽리 주민 1명이 9․28 수복 후 부역혐의로 주엽리 치안대 사무실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10월 18일 오후 6시경 의용경찰대원과 시국대책위원회 회원들에 의해 주엽리 앞 하천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에 관여한 자는 의용경찰대원 김효은, 이은칠, 엄진섭, 오형구, 신현섭, 청년방위대원 장귀동, 주엽리 치안대원 최만재와 시국대책위원회 이병학 등 8명이었다. 이 중 이병학, 장귀동, 최만재가 직접 총살했으며, 김효은은 총성만 듣고 돌아왔고 이은칠은 총살 후 현장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한다.
마포 승리 고무공장 노동자였던 한요수, 한일성은 인민군 점령기 민청에 가입하여 자위대 일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요수의 부친 한익석이 주엽리에서 아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어느 시체가 한요수의 것인지 분간 할 수 없어 그대로 돌아 왔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당시 함께 희생된 주민들이 3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구체적인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5) 현천리 사건

현천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구장이었던 민영환이 희생자 황뇌성을 강제징용 보내려고 하여 양쪽 집안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9·28 수복이 되자 현천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황뇌성은 양주군 송추에 피신하고 있다가 10월 초순경 가족의 상황이 궁금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치안대에게 잡혀 현천리 건너말창고에서 갇혔다. 10월 중순경 그의 동생 황을성은 황뇌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치안대에게 끌려가 몽둥이로 맞고 풀려났으며, 그 후 일주일 정도 몸조리를 하다 다시 끌려가 감금되었다. 이 부역혐의자들이 감금되었던 건너말창고는 방앗간으로 쓰였던 곳으로 리사무소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황정호는 부친 황을성이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갔다가 치안대가 감시․관리하던 현천리 건너말창고 안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창고 바닥에 가마니와 짚이 깔려 있었고, 머리가 터져서 광목으로 맨 사람, 눈도 못 뜨는 사람, 맞아서 팔이 부어오른 사람들 열댓 명이 있었다. 황은호 역시 부친 황뇌성에게 밥을 갖다 주러 간 모친을 따라 갔다가 창고 안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당시 황뇌성이 매를 맞아서 얼굴이 멍든 상태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황뇌성은 1950년 10월 10일경 수색으로 끌려가던 중 다락고개에서 희생당했다. 그의 동생 황을성은 황뇌성이 희생된 지 보름 후 현천동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이때 같은 마을 주민 정범성과 남전, 먹골의 주민 등 10여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화전리 농민위원장이었던 희생자 황온순은 위 공동묘지에서 6명의 현천리 치안대에 의해 돌로 죽임을 당했는데 이 장면은 공동묘지 정상에서 황정호가 직접 목격하였다. 희생자 황온순의 시신은 사건 후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 자리에 매장되었다. 태극단 현천지단원 공은억도 위 황온순이 인공치하 화전리 농민위원장이었는데 동네에서 때려죽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황뇌성, 황을성의 시신은 그들을 살해한 치안대원이 마을주민들에게 연락을 해서 시신을 수습했는데, 가족들은 시신 수습 당시 낮에는 보복을 당할까봐 무서워서 밤에 남모르게 시신을 매장했다고 한다.

6) 화전리 계곡 사건

1950년 9월 20일경 행주지역이 수복이 되자 화전리에서는 공은억 등 치안대원들이 황재덕, 지희덕 등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하여 인공치하 화전리 인민위원회 사무실이었던 곳에 감금해 두었다. 이때 행주나루터로 상륙한 해병대가 들어와 치안대가 잡아 놓은 인민위원장을 넘기라고 하자 치안대원들이 화전리 인민위원장 황재덕을 넘겼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해병대가 황재덕을 등 뒤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으며 공은억은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지희덕 역시 국군 수복 직후 치안대 사무실로 쓰였던 화전리 주민 김광식 소유의 한옥집 사랑채로 끌려 가 여러 날 감금되었다가 신도지서로 넘겨졌다. 살아남은 지희덕, 김순범 등 부역혐의자들은 마을 주민들의 탄원에 의해 신도지서에서 풀려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웃 마을 덕은리 치안대 최봉구, 김순돌 등 4명에 의해 1950년 10월 20일 화전리계곡으로 끌려 가 학살당했다.
태극단원 공은억은 희생자들이 2차 연행될 당시 끌고 가는 최봉구 등 치안대원들과 함께 있었는데 화전리 계곡까지는 가지 않아서 사살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였으나 최봉구로부터 이들을 총살하러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공은억은 “이들이 큰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용서해 주라”고 부탁했으나 치안대 최봉구 등은 “현천리 난점 수수밭에 숨어있던 정보국 국군 대위를 잡은 사람들이므로 총살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위 공은억이 희생자들이 끌려가는 현장에 있었으므로 희생자들을 죽인 자는 공은억이라고 알려졌으나 공은억은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
사건 직후 화전리 계곡에서 총소리가 나자 희생자 지희덕 등이 연행당한 사실을 목격한 마을 주민이 지희덕의 부친 지득근에게 전해주었다. 사건이 발생한 1950년 10월 20일 오후 4시경 지득근은 “자식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큰 손자 지영호를 데리고 사살현장으로 가서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다. 지영호에 따르면, 지희덕이 총에 맞아 사망한 상태로 옆으로 뉘여 있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희생자 시신 3~4구가 함께 있었는데, 희생자 지희덕의 가족들은 늦게 연락을 받은 편이었는지 희생자들 일부 시신은 이미 그 가족들이 수습을 해 간 뒤였다. 이 외에 향동 주민들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이 화전계곡에서 희생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