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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 유족들의 저항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개입 과정

이미 살펴봤듯이 1950년 10월 4일 경인지역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고 그 산하에 부역자 처리문제를 전담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가동되었다. 이들은 가동 직후부터 육군 CIC, 헌병대, 검찰, 경찰을 총 동원하여 부역자를 색출․처단해 왔다.

고양경찰서 역시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지휘를 받는 경기도 경찰국의 명령에 의해 부역자 문제를 처리해 왔다. 그런데 국군 수복 직후 고양경찰서의 부역자 처리는 학살 일변도였다. 9월 20일 이후 10월 25일 사이에 고양군에서 연행된 주민들이 검찰로 송치된 경우는 확인되지 않는데, 의용경찰대원 역시 이 시기에 검찰에 송치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고양지역에서 확인되는 형사사건기록은 서울지역과 미군에게 체포된 경우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10월 26일 이후 검찰 또는 군 수사기관으로 이관된 것들이었다. 즉 10월 25일까지 고양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대부분 학살당했으며, 10월 26일까지 조사를 받던 주민들과 그 후 체포된 주민들이 헌병대나 검찰로 송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차별 학살이 진행되는 공포 상황에서 대부분의 유족들은 숨 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으나 공포가 완화되면서 유족 중 지역 유지 또는 군인이나 경찰의 가족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인 1950년 10월 7일 마두리 치안대장 임대복 등 140여 명 주민들이 고양경찰서에 갇혀 있는 최의현을 석방시키기 위해 연서로 진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진정서의 내용은 최의현은 반역도배가 아니고 계획적으로 동민을 구원하였으니 석방해 달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진정서를 제출한 보람도 없이 최의현은 10월 13일 학살당했다.

형사사건기록에 따르면, 희생자 최의현의 학살사실을 몰랐던 최만현은 10월 19일 검찰총장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문서로 확인되지 않으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 한창석의 유족들도 군 관계자들에게 진정을 했다고 한다.

2. 개입의 동기

합동수사본부는 경인지구 계엄사령부 산하에서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는 수사기관이었다. 이들은 학살에 의한 부역자 처리 과정을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국군 수복 직후부터 있었던 민간인 학살을 몰랐을 리 없었다. 이런 그들이 학살의 과정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개입을 시도한 것은 부역자 처리 과정이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던가 아니면 이미 목적을 달성한 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김창룡은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부역자로서 자기 신분을 엄폐하여 치안대 혹은 자위대원이 되어 자기 죄상이 폭로됨을 두려워 일시적 보신책으로 우익인사를 체포 구속한 것 등인데…”라고 하여 치안대원 중 상당수가 부역자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서 김창룡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거론하고 있지 않는데, 그의 고민은 치안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이 많았다는 점이 아니라 살아남아 있는 부역자 상당수가 여전히 치안대로 활동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김창룡 등은 국군 수복 초기 부역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피난했거나 피신해 있던 주민들은 마을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부역행위 여부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잔류해 있던 주민들의 여론을 듣는 것 외에는 없었을 것이고 그것도 내부 배신자 즉 부역자의 의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1950년 10월 4일 전국 경찰에게 내려진 세번째 긴급임무 ‘민중조직-정보망, 공작조직의 활용’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경의 고위급 간부들은 처음부터 치안대원의 상당수가 부역자였음을 알고 있으면서 이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0월 한달 동안의 부역자 처리과정에 이들을 치안대로 이용한 뒤 다시 부역자로 재처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치안대원들은 토끼사냥이 끝나고 잡아먹히는 개의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치안대원들이 ‘비상조치령’에 의해 부역자로 처벌된 것이지 주민 살해의 범죄로 처벌된 것이 아니라는 점, 부역행위를 했더라도 전쟁 전 우익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 치안대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는 점, 학살과정에 가담한 경찰관 중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3. 합동수사본부의 조사 경과

주민들의 진정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합동수사본부 수뇌부의 결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합동수사본부는 10월 23일 고양경찰서에서 석방된 희생자 김석권의 부친 김상용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금정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하였다. 형사사건기록에 따라 합동수사본부의 수사일지를 재구성하자면 다음과 같다.

[10월 19일] 검찰총장 앞으로 유족 최만현이 ‘사건 심사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제출함.

[10월 23일]  합동수사본부는 금정굴에서 이경손을 구출했다는 이유로 10일부터 22일까지 고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석방된 유족 김상용을 면담함. 합동수사본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10월 25일] 고양경찰서장이 직접 가담하여 금정굴에서 20명을 총살함. 이날 이후 금정굴에서의 총살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날 금정굴에서 마지막 총살이 집행되었던 것으로 보임. 그런데 이 날의 총살은 이미 합동수사본부가 인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것으로 합동수사본부의 직접 지시 아래 벌어졌을 개연성이 있음.

[10월 26일]  합동수사본부, 유족 한익석, 이규붕, 최승윤, 박완순과 의용경찰대원 조건식, 강신원을 면담함.

[10월 27일]  의용경찰대원 조병태를 면담함.

[11월 2일]  의용경찰대를 소집 한 후 모두 연행함. 의용경찰대원 성기창, 조병태(2회), 피원용, 이진, 양재남, 강흥환, 강금로, 박종철, 김금룡, 김영조, 최우용, 엄진섭, 김정식, 이계득, 최상철, 허숙, 조병세, 이광희, 신현섭, 이근용, 이은칠, 이승권으로부터 청취서를 받음. 유치장 담당 순경이었던 정준섭은 이경하 등 시국대책위원회원과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들이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연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함.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이들을 연행하기 전에 유치장을 둘러봤다고 함. 합동수사본부는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는 기구이므로 부역자 처리 현황에 대해 항상 점검하여 처리방침을 결정했을 것이므로 정준섭이 목격한 합동수사본부의 유치장 점검행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임.

[11월 3일]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장재갑이 범죄조사서를 작성함. 조병태 외 26명의 범죄행위는 부역활동으로, 이경하 안병선의 범죄행위는 재산갈취로 적었음. 합동수사본부는 시국대책위원회 안병선, 의용경찰대원 김영배, 경찰관 한경옥, 송병용을 조사하고 청취서를 작성함.

[11월 4일] 몰수품 대장과 현금 수불장을 영치하였으며, 의용경찰대원 이은칠, 조병세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 청취서가 아닌 것으로 보아 이날 이후 의용경찰대원들이 피의자 신분으로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임.

[11월 5일] 의용경찰대원 조병태, 강흥환, 이진, 이경하, 양재남, 피원용, 시국대책위원장 이경하, 위원 안병선으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

[11월 6일] 성폭행 피해자 김○○을 청취조사함.

[11월 7일] 증인자격의 주민 강영신, 치안대원 강신원으로부터 증인신문조서를 작성함.

[11월 8일] 부면장 이기현, 시국대책위원 김성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 중면장 최영직으로부터 청취서를 받음.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피의자로서가 아니라 증인자격으로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고양경찰서원들의 금정굴 학살행위가 합동수사본부의 조사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됨. 검사 장재감 등 검찰직원들이 금정굴 현장을 방문하여 검증조서를 작성함.

[11월 9일] 의용경찰대원 엄진섭, 이진(2회), 오흥석, 강금로, 김영배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

[11월 10일] 의용경찰대원 25명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함.

[11월 18일] 의용경찰대원 이은칠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

[11월 19일] 의용경찰대원 이계득, 박종철, 김금룡, 김영조, 최우용, 최상철, 이광희, 신현갑, 이근용, 김정식, 김효은, 허숙으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

[11월 20일] 서울지방검찰청, 안병선, 이진, 양재남, 강흥환, 성기창, 박종철, 김영용, 김영조, 최우선, 엄진섭, 김정식, 최병철, 허숙, 오흥석, 이광희, 김영배, 신현섭, 이근용, 김효운 등 19명에 대하여 불기소를 결정하였으며, 조병세 외 나머지 7명에 대하여 공판청구서를 작성함. 이로보아 합동수사본부는 안병선 외 18명에 대해 C급으로, 조병세 외 7명에 대해 B급으로 결정한 것으로 판단됨.

[12월 22일] 군법회의(서울지방법원)는 조병세 외 7명에 대해 선고함. 조병세, 이경하는 사형, 이계득은 징역 10년(28일 감형령으로 5년으로 감형)을 선고함.

[1951년 1월 13일] 조병세, 대전형무소에서 영양실조 병사함.

[1951년 10월 11일] 이계득, 병보석으로 석방됨.(1954년 5월 재수감)

[1953년 4월 25일] 피원용, 형집행정지로 석방됨.

4. 합동수사본부의 조사결과

1) 고양경찰서의 은폐 시도와 희생사실 확인

가해 측은 사건 초기부터 금정굴 사건을 숨기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양경찰서측은 임시유치장에서부터 처형의도를 철저히 숨기며 이송작업을 하였다. 이는 사건의 초기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부터 희생자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이송되는 줄 알고 있었으며 호송작업에 참여한 태극단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또 다른 희생자의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갔으니 더 이상 밥을 가져오지 마라’는 말로 희생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양경찰서의 은폐 시도는 금정굴로의 이송 중에서도 드러난다. 금정굴로 끌려가는 행열이 곧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이 주민들에게 알려진 후부터 고양경찰서측은 금정굴로의 이송경로를 바꾸어 끌고 갔으며 이송 중에도 다른 주민들이 보지 못하도록 공포탄을 쏘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고양경찰서는 학살사건 후 이 사실을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최승윤은 희생자 최의현이 1950년 10월 13일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는데, 10월 26일에서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경찰에게 부탁해 알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김상용으로부터 희생자 이봉린의 처형사실을 알게 된 이병순은 삼촌 이삼린과 마을 주민 등 7명과 함께 금정굴로 가 부친 이봉린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생존자 이경선을 구해내는데 그쳤다. 이들은 오후 1시 경 돌아왔으나 그 뒤 오후 3시경 형사부장과 치안대원들이 이삼린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땔감용 나무둥치 속을 대검으로 쑤시면서 “시체 내 놓으라”고 했고 형사부장은 공포를 2~3발 쏘기도 하였다. 한편, 1950년 11월 이무영서장은 금정굴에서의 집단학살사건에 대하여 지휘책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처벌을 면하기 위해 태극단장 이장복에게 이 사건을 태극단이 저지른 것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금정굴 학살사건에 대한 이러한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합동수사본부의 조사과정에서 상당 부분의 진실이 드러났다. 의용경찰대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범죄에 대해 구체적 경위와 지휘 명령계통까지 아는 한 밝혔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사상검사로 유명했던 장재갑이 금정굴 현장을 방문하여 동굴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희생자들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은 검증조서와 현장 약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검증조서

조병태 외 26명에 대한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서울검찰청 검사 장재갑(張載甲)은 수사관 안정주(安正主), 서기 강○○ 입회하에 1950년 11월 8일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에서 다음과 같이 검증함.
1. 검증장소
  고양군 벽제변 성석리 「감내고개」 금광굴
1. 검증목적
  우 광내에 투기(投棄)된 사체의 유무 및 그 상황을 확인함에 있음.
1. 검증결과
  「감내고개」는 고양경찰서 소재인 고양군 중면 일산리로부터 동북방면 2km 지점에 있고, 「감내고개」 금광굴은 일산리로부터 곡능(谷陵)으로 통하는 동(同) 고개 도로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미터 되는, 높이 약 50미터의 적은 정상에 있는데, 그 주변에는 혈흔(血痕)이 점점(点点)하고 엠1 탄피가 산재하였으며, 광직경(壙直徑)은 약 3미터였음. 광내를 자세히 내려다보면 광은 마치 우물(井)같이 직하로 약 10미터 되었고 그 저(低)면에는 석양 그늘에 명확하게는 보이지 않으나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광내에서 떠오르는 부패된 시체의 악취가 코를 찔러서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음.
이 검증은 1950년 11월 8일 오후 4시 30분부터 동일 오후 5시까지 하였음.
1950년 11월 8일
동소(同所)에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장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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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검증조서 내 금정굴사건 발생 위치도. 지금의 지도와 비교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 사건의 왜곡

당시 검찰은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고도 오로지 의용경찰대원들의 부역혐의만을 기소했으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을 하지 않았다. 마치 민간인 학살은 범죄로도 여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단적인 예가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조병세에 대한 조사결과에서 드러난다. 당시 검찰은 금정굴에서의 학살에 대해 ‘전투 중에 벌어진 사건으로, 즉결처분이었으며, 고양경찰서 경찰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의견만을 제출하였다. 이는 금정굴 학살 사건을 불법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불가피했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절했던 것’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는 전투가 끝나고 한 달 가까이 치안이 회복되던 중이었기 때문이었으며, 즉결처분의 불법성은 당시 수사관의 질문에서도 확인되는 바가 있으므로 검찰의 이 의견은 학살사건에 대한 왜곡임에 틀림없다. 신문을 받던 조병세조차 ‘경찰의 지시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을 헤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 바가 있다. 당시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은 당연히 불법이었다.

3) 학살에 의한 부역자 처리에서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로 이행

고양 금정굴학살 사건은 마치 합동수사본부의 직접 개입에 의해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중면 부면장 이기현은 “검찰에서 체포 후에 즉결처분이 중지된 것 같으니 주민은 이때 법의 존재를 확인하여 더욱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 그 동안의 민간인 학살도 합동수사본부의 지휘 아래에서 자행되었음이 분명하므로 이들에 의해 학살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살이 끝난 후 합동수사본부가 직접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합동수사본부가 고양경찰서 부역자 처리과정에 직접 개입한 최초 날짜는 적어도 김상영 노인이 조사를 받은 10월 23일로 확인된다. 따라서 합동수사본부는 10월 23일 이후 그 동안 있었던 금정굴 학살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였고 또한 학살이 계속 진행 중인 사실을 알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미 본 바 있듯이 10월 25일 고양경찰서장이 직접 가담하면서까지 20여 명을 또 다시 학살하였다. 합동수사본부가 이를 직접 지휘했는지 또는 방조했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10월 25일의 금정굴 학살을 막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고 있던 합동수사본부의 지위로 보아 오히려 이날의 학살 사건의 경우 직접 지휘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합동수사본부는 10월 26일부터 본격적으로 의용경찰대원 및 주민들을 소환하여 조사했으며 11월 2일 의용경찰대원들이 소집하여 연행하였다. 물론 태극단은 10월 25일 국방부 정훈국으로 편입되므로 연행당하지 않았다.

이상을 정리하면,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2일 사이의 시기는 마치 ‘학살에 의한 부역자 처리’의 마지막 과정을 마치고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가 시작되는 분기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고양지역의 ‘비상조치령 위반’ 사건 재판관련 기록 대부분이 10월 26일 이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고양지역에서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재판결과, 조병세는 자위대장이었다는 이유가 가장 큰 처벌 이유였으며, 이경하는 주민들의 생명피해를 줬다는 기록이 없고 재산을 수탈한 과정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인민군 환영위원장’이었다는 이유가 사형 판결의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계득은 11월 3일 집합당한 후 체포당했다고 하는데, 당시까지 죄명을 몰랐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서야 비로소 부역행위로 인한 특별조치령위반으로 처벌받은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1950년 11월 3일 범죄조사서에 따르면, “제1, 피의자 조병태, 김정애, 피원용, 이진, 양재남, 강흥환, 성기창, 강금로, 박종철, 김금룡, 김영조, 최우용, 엄진섭, 김정식, 이계득, 최상철, 허숙, 오흥석, 조병세, 이광희, 김영배, 신현섭, 이근용, 이은칠, 김효은은 북한 괴뢰군이 남침한 금차 비상사태에 승하여 괴뢰군 자위대에 자진 가입하여 민족진영인사들을 체포 또는 추출하고, 제2, 피의자 이경하, 안병선은 공모하고 이번 비상사태에 승(乘)하여 4283년 10월 상순부터 동월 하순까지 사이에 두서(頭書) 피검자 등의 주소지인 고양군 중면 일산리에서 소위 역산이라하여 약 10세대의 가산을 전부 갈취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로 보아 결국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의용경찰대는 모두 부역혐의로 기소될 처지였던 것이다.

이경하는 「비상조치령」위반으로 1950년 12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판사 강봉제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대구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고 하나 『대구교도소 재감인명부(1950, 1951)』와 『대구교도소 군예치인명부(1951)』에서 재감 및 형 집행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도서출판 자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