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장군, 이치업 스티븐 엠 딸프 공저, 원민, 2001)

 

*이치업 : 전쟁 발발 당시 작전국 교육과장(작전국장은 장창국, 강문봉)

 

<일제강점기>

 

"우리는 후보생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1주에 한 번씩은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토벌작전에 투입되곤 하였다."(61쪽)

-이치업은 일본군 59사단에 소속되어 중국 진안에서 근무하면서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이 증언은 항일투쟁의 진압군으로 동원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물론 나는 결코 친일부역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친일 행각에 대해 비난을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겉과 속이 다르게 일본의 제도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69쪽)면서 자신의 독립운동을 말살하던 부일행동을 합리화 하고 있다. 이렇게 친일행동에 너그러웠던 친일부역자 이치업은 한국전쟁 전후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자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전> 

 

"(박정희는) 공산당 조직책으로서 수년 전에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2주 전에 남로당 관련자들 200명의 명단이 들어있는 정보를 당국에 제공한 공로가 인정되어 사형집행 대신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결국은 형 집행정지를 선고 받았다는 것이었다."(24쪽)

 

"(육군본부 작전국은) 상당히 큰 거눌인 그 곳에는 1층에 정보국, 2층에는 작전국, 그리고 지하에는 인근 용산역과 직통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21쪽) 

 

"6월 24일 저녁, 한국군의 대다수 고급 장교들은 장기간의 비상경계가 그때 해제됨에 따라 서울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에는 육군 총참모장 이하의 모든 사단장들, 그리고 육군 본부의 고급 장교 대부분이 참석하였다.

그 날 밤의 파티는 환영과 진급을 축하하는 미군 클럽으로 몰려갔다. 당시 그곳은 서울에서 가장 멋진 유흥장소 중의 하나였기 대문이었다."(23쪽)

- 24일에는 군최고수뇌부들이 25일 남침정보를 안건으로 회의를 열었음. 일부 장교가 비상경계 해제 반대하고 휴가 중단을 요구했다고 함. 이들이 25일 군인 회관 개관식에 이어 2차로 클럽으로 갔다는 것. 말이 안되는 상황. 게다가 당시 술값을 냈던 사람이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고 함.

 

"우리는 육사에 근무하는 동안 보급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쌀 부족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중략)... 당시의 보급 장교는 이영순으로 나는 그에게 쌀을 구하기 위해서 적당한 곳에 가서 보리를 쌀로 바꾸는 방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암시장에서의 쌀과 보리의 교환 비율은 쌀 한 되 당 보리 두되였다."(93~94쪽) - 부정부패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당시 군 지휘부의 행동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장교들의 식량빼돌리기는 사병들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불만이었음이 국방부 '한국전쟁사'에서 확인된다.

 

"내가 부산 5연대에서 근무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내려갔을 때 백선엽 장군은 그때까지도 소령이었으며 진급이 되지 않아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98쪽)

 

"김익열 소령은 당시 정부 관료들로부터 민족청년단 계열로 지목되어 누구도 자신에게 보직을 주려하지 않았기때문에 누군가 그를 믿고서 군 보직을 주지 않는 한, 군을 떠나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9연대의 부연대장으로 기용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군을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101쪽)

 

"1948년 6월이 되자 박진경 대령(내가 부산 5연대 A중대장이었을 때, 그는 A중대 인사계였다)이 김익렬의 후임자로서 9연대장이 되었다."(107쪽)

 

"김익렬 장군은 1988년 12월 사망하기 바로 직전 제주도 43사태에 대하여 간단한 수기를 집필하였다."(110쪽)

 

"드디어 나는 1948년 후반기에 부산의 3여단 참모장이 되었는데 여단장은 최덕신이었다. 그는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와 잘 연결된 사람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밀사로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과의 연락 임무도 수행하였다."(115~116쪽)

 

<한국전쟁기>

 

 "후일 새롭게 알게된 것은 우리 집 가정부가 북한 첩자였는데 우리가 살던 동네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 한다."(20쪽) 인공시기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 "북한 첩자"로 인식.  

 

"(6월 27일) 그날 밤 10시경 안국동에 있는 종로파출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부근의 학교 교정에 있는 다수의 군인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보고 내용이었다. ... 상황 파악 후 다시 육군 본부로 돌아오는 도중에 수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 육군본부르 복귀하는데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5시간을 길가에서 허비하였다."(26~27쪽)

 

"하우스만 대위는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과 미 군사고문단장 사이에서 연락장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과 행동을 같이 했어야만 했다."(28쪽)  

 

"우리 연대로써 다행이었던 것은 동해에서 임무를 수행중인 미해군 미조리합에서 16인치 함포로 우리에게 화력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129쪽)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도중 ... 우리는 영덕까지 진격하는 동안 적을 조우하지 못하였고 다만, 계속 많은 적군의 시체만을 보았을 뿐이었다."(133쪽)

 

"그들은 33,629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55,000여 명의 사상자라는 희생까지도 감수"(2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