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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양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6 20:40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506

<전쟁 전 피해>

 

양산지역에는 전쟁 전부터 국군 3사단에 의한 토벌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공군 조종사였던 윤응렬은 1950년 4월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김종원 3사단 23연대장을 태우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륙하여 동래에서 해운대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나 양산으로 향했는데, 당시 양산에는 치열한 공비소탕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양산국민학교에는 토벌국군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했다.(윤응렬, 108) 이와 관련하여 당시 양산경찰서에서 근무했던 문씨(문영식)는 “전쟁 전부터 김종원부대가 양산 지역 공비 토벌을 위해 주둔하였으며 전쟁 발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주둔하였다. 경찰이 공비를 잡으면 김종원 부대에서 인계하여 처리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로 보아 양산지역의 토벌작전에 의해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인민군이 접근하지 못했음에도 양산지역에서 대규모의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양산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거나 연행되었다. 이들은 세 등급으로 나뉘어졌어며, A급은 유치장에, B․C급은 목화창고에 구금되었다. 당시 양산경찰서에는 유치장이 4개 있었는데 처음에는 3곳에 남자들이, 1곳에 여자들이 수용되어 있었으나 계속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유치장 4곳에 모두 남자들이 수용되었고 여자들은 목욕탕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8월 중하순 여러 차례에 나뉘어 양산군 동면 사송리 사배재(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뒷산)와 동면 여락리 남락고개 등에서 총살당했다. 8월 9일부터 22일까지 2주에 걸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1960년 부산일보 기사에 의하면 양산군에서 1950년 8월 ‘빨갱이로 몰려 총살’된 주민이 730여 명이라고 하였고, 국제신보 기사에 의하면 ‘750여 양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죄 없이’ 죽어 갔다고 하였다. 1960년 7월 동면 사송리 사배재, 동면 여락리 남락고개 등에 대해 유해 발굴을 했을 때는 모두 712구의 유골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웅상지서 주임 오씨(오강환, 31세)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양산경찰서 사찰주임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서 보내라고 전화를 하였으나 ‘서창(웅상면) 사람들 하나라도 끌고 가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냥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오씨는 웅상면을 제외한 나머지 양산 지역 보도연맹원들은 범어사 뒷골짜기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좌익혐의 피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양산지역에서도 부역혐의사건이 발생하던 시기에 민간인들 피해가 나타났다.

양산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양산네거리 등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이 사실은 1950년 10월 16일경 양산경찰서에 잡혀 있던 물금면 어곡리 우종하 등 주민들이 양산네거리에서 총살당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같은 해 9월 아들이 입산했다며 양산경찰서 사찰계로 잡혀 간 주민이 한 달 뒤 행방불명되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8. 9.~22.

여락리 남락고개 등

712

양산경찰서

1950. 10. 16.

양산네거리

양산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