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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무안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3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563

<전쟁 전 피해>

 

무안 하의도에서는 1946년 8월 강제공출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이 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분노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하의도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미군을 파견했다.

주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공격은 1949년에도 있었다. 1949년 8월 14일 무안경찰서는 해제면 만풍리 이창현 등 5명의 주민들을 운남면 내리 저동마을 야산에서 총살하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 무안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무안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주민들은 경찰에 의해 분류되어 일부는 목포형무소로 보내져 희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무안경찰서 근무자 이씨(이영준)는 유치장은 2개로 모두 4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목포형무소에 감금된 보도연맹원은 1950년 7월 13일 부터 경찰이 후퇴하기 전인 7월 23일 사이 목포시 인근 바다(신안군 비금면 해상)로 전남도경찰국 경비선에 실려 나가 선상에서 사살된 후 바다에서 희생당했다. 이들 외에 무안경찰서에 남겨진 국민보도연맹원들 역시 어디선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까지 이에 대해 조사된 바는 없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해제면에서만 36명 정도가 희생되었다는 증언을 확보한 바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무안지역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도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10월 3일~4일에는 23가족 150여 명이 해제면 천장리 가실해안가에서 인민위원장 등 50여 명에 의해 집단희생되었다고 한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일가족이 희생된 경우가 많다. 무안지역이 완전히 수복된 것은 1950년 10월 15일이라고 하며, 시신은 1951년 3월 가해자의 가족들을 동원해 수습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국군 수복 후에 발생한 사건 중 대표적인 것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사건 발생일이 언제였는지 조사마다 다르며, 비록 완전한 수복이 늦었다고 하나 읍내 등 주요 지역이 이미 수복된 상황에서 150여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있다.

이 사건의 발생 시기는 판결문, 전남일보, KBS위령비, 무안군사 등 자료마다 달랐으며, 가해주체도 패주하던 인민군, 지도방면에서 온 무장공비, 천장리 자위대로 각각 달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1950년 10월 4일 저질러진 것으로 판단했는데, 가해자 관련 판결문들에는 각각 9월 15일과 10월 1일로 서로 다르다.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는 10월 14일로 기록되어 있고, 1952년 공보처가 발행한 『피살자 명부』에는 여러 날에 걸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0월 4일과 6일 희생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희생자들에 대한 사망신고는 대부분 10월 3일로 되어 있다.

 

<부역혐의 피해>

 

무안지역이 무안경찰서에 의해 완전히 수복된 때는 10월 14일이라고 하는데,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경찰이 수복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안경찰서는 1950년 10월 함평읍 가동리 주민 은성수와 무안읍(당시 면성면) 성남리 주민 박희규 일가 3명을 고절리 무안천변의 한다리교 밑에서 총살했다. 한편 10월 14일 무안읍 성남리에 거주하던 박희규와 그의 가족을 좌익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장소에서 경찰이 총살했다. 이때 3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이외에 무안경찰서는 몽탄면 학산리 산음마을 주민 이일신을 마을 인근 철로 변에서 총살했으며, 같은 시기 몽탄면 이산리 배뫼마을 주민 임종일은 무안경찰서 경찰의 수배를 피해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망운지서는 연행한 주민들을 면소재지 면화창고와 금융조합창고에 감금했는데, 당시 연행된 주민들 중에는 현 운남면 사람들이 많았다. 1950년 10월 중순 연행된 주민 중 30여 명이 압창포 백사장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한 망운면 목서리 김상균의 동생 김천우(교사, 당시 28세) 등이 있었다. 당시 치안활동에 참여했던 주민 증언에 의하면, 지서에 있던 수류탄을 사용해 폭사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삼향지서는 1950년 11월 4일 우익단체원들을 동원하여 지서 인근 섬너리 갈대밭에서 삼향면 유교리 주민 정해선을 총살하였다.

해제지서는 수복 후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대한청년단원들을 이끌고 각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1950년 10월 30일 5명의 경찰이 10여 명의 대한청년단원들과 함께 송석리 송계마을에서 노영수 외 1명을 총살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함께 있었던 대한청년단원 출신 주민이 이를 목격하였다. 이에 따르면, 경찰 등은 마을에 도착하자 이장에게 밥을 지어달라고 했고 이에 이장이 앞에 간 경찰이 밥을 다 먹고 가서 새로 짓겠다고 하자 경찰이 이를 트집 잡아 사살한 것이었다. 해제지서는 1951년에 들어서도 주민들을 계속 살해했다. 1월 4일에는 해제면 만풍리와 송석리 주민 정종태 외 6명을 양매리 지서 인근 바닷가에서 총살하였고, 2월 5일에는 만풍리 주민 정성준을 총살하였다. 한편, 같은 날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접한 정종태의 부친 정성준은 경찰에게 수차례에 걸쳐 이를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정성준까지 연행하여 해제지서 인근 야산에서 총살했다.

현경지서는 1950년 10월 31일 지서에 갇혀있던 현화리 성재마을 주민 박황보 등 주민들을 현경면과 망운면의 경계지점인 장가테에서 총살했다. 현경지서는 10월 28일 현화리 주민 정귀례를 살해했으며, 11월 6일에는 그 당질 박기재를 타살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6. 8.

하의도

미군정

전쟁 전

1949. 8. 14.

저동마을 야산

5

무안경찰서

보도연맹

1950. 7. 13.~23.

신안 비금면 바다

전남도경

인공

1950. 10.

천장리 가실해안가

95

인민군

부역

1950. 10. 14.

고절리 무안천변

30

무안경찰서

부역

1950. 10.

압창포 백사장 등

50

각 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