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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영월지역사건 종합

2013.07.02 15:54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138

<부역혐의 피해>

 

영월은 봉화에 주둔하던 수도사단 18연대가 1950년 9월 28일 진입하면서 수복이 이루어졌다.

영월지역에서는 수복하던 국군에 의한 주민 학살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나 당시 경찰서에 의해 학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950년 10월 26일경 영월경찰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 수백 명이 영월읍 영흥리 장릉(능말) 소나기재 두목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이때 후탄리 인민위원장이었던 이태인이 북쌍리(쌍용리) 목영근과 함께 쌍용지서로 불려간 후 영월경찰서로 이송되어 영월읍 두목골짜기에서 희생되었으며, 북쌍리(쌍용리) 인민위원장 안양길 등도 경찰에게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영월경찰서가 직접 저지른 사건 외에도 각 지서에 의해 사건이 벌어졌다. 1950년 10월 말에는 무릉리 아리골 인민위원장 김수규, 수주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송갑헌 등 5명의 주민들이 청년방위대에 의해 수주지서로 끌려간 뒤 무릉리 강변 등에서 희생되었다. 이들과 함께 희생되었던 전쟁 전 대한청년단장이었던 김관수의 시신도 무릉리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서면지서와 주천지서에서도 청년방위대원들이 잡아 온 주민들을 지서 뒷산에서 학살한 사실이 확인된다.

 

1970년 내무부 정보과 『업무지시』에 따르면, 영월지역에서 한국전쟁시기 부역자라며 즉결처분된 주민들의 수는 226명으로 나타난다. 영월경찰서 산하에는 주천지서를 비롯한 9개지서가 있었는데, 각 지서는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을 자체적으로 학살하거나 영월경찰서(서장 이대인)로 이송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미군폭격 피해>

 

영월지역에서는 미공군에 의한 폭격사건도 확인되었다.

1951년 1월 27일 정찰기가 강원도 영월군 서면의 절구지말과 배말을 정찰한 후 제트 전투기 4대가 마을을 공격하여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전투기는 네이팜탄과 기총사격으로 주민들을 공격했는데, 미 폭격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찰기는 인민군이 200명 정도 있다고 했으나 전투기는 한 명의 적군도 볼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주민 10여 명이 사망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부역

1950. 10.

소나기재 두목골짜기

226

경찰

1970 정보과자료

폭격

1951. 1. 27.

서면 절구지말 등

15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