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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하동지역사건 종합

2013.07.26 20:5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339

<전쟁 전 피해>

 

1946년 10월 8일 추수봉기에 나선 농민 2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4명이 피살되었다.

전쟁 전 하동에서는 화개면에 국군 5사단 15연대와 3연대가 주둔했다. 15연대는 잠깐 있었고 3연대는 1949년 봄부터 여름까지 몇 달간 주둔했다. 이 상황에 대해 하동군 대한청년단원 조씨(조옥동), 정씨(정경영)가 증언했는데, 이에 따르면, 군인들에게 잡혀 온 주민들은 화개면 담배창고에 감금되었다가 화개면 부춘리 섬진강변과 담배창고 뒷산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총살에 참여했던 5사단 3연대 군인 김씨는 “화개 담배창고 뒤쪽 고지에서 민간인을 총살했다. 당시 그곳에 주둔하던 우리 분대가 가서 보초를 섰는데, 처음 구덩이에는 2명, 두 번째 구덩이에서는 7~8명을 사살했다.”라며 학살사실을 인정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하동지역에서는 7월 11일부터 말일까지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유치장으로 연행했다. 당시 유치장은 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먼저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끌려 나가면 다시 주민들이 잡혀 들어왔으므로 희생자들은 이 보다 훨씬 많았다. 주민들은 등급에 따라 진주형무소로 이송된 경우도 있었으며, 구례 밤재 너머 남원경찰서로 넘겨져 지리산 근처 산청 넘어가는 고개에서 희생되거나 광양지역에서도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7월 24일 하동경찰서가 섬진강 건너 광양시 진월면 백운산 기슭 매티재에서는 5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사건을 규명했다. 한편, 이 사건의 희생자는 250여 명에 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동은 7월 26일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이 하동지역을 점령한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미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피난을 떠난 양보면 감당리 주민 40여 명이 장암리 도로변 다리위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정찰기 L-19 정찰(한국공군 의심, 미군의 정찰기 기종은 무엇이었나?) 후 전투기 2대의 기총사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1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하동과 진주지역에서는 영남지구편성관구사령부(사령관 채병덕)와 미 24사단이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31일까지 방어전투를 치렀다. 이 지역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쇠고개에서 진지를 구축하던 중 27일 채병덕 중장이 전사했으며, 29일에는 진주로 철수했다.

 

<부역혐의 피해>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이 하동지역에서 후퇴하자 수복한 하동경찰서는 인민군 측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색출하여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하동경찰서에 자수한 금남면 황월봉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군경에게 불려 나간 후 하동군 하동읍 송림 옆 섬진강변 모래사장에서 사살된 사실을 규명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봄.

부춘리 섬진강변 등

10

5사단

보도연맹

1950. 7. 11.~24.

광양 매티재 등

300

하동경찰서

폭격

1950. 7. 31.

양보면 장암리

11

미군

부역

1950. 10.

하동읍 송림

하동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