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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창녕지역사건 종합

2013.07.26 20:47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244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고 창녕지역에서 가장 먼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희생되었다.

각 지서를 통해 창녕경찰서 유치장과 무도관으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 희생당했는데, 50여명이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 가 총살당한 사건만 확인되었다. 다른 주민들은 창녕경찰서에서 트럭으로 실려 나가 마산 시민극장을 거쳐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괭이바다(현재의 마산시 구산면 원전마을과 거제시 장목면 칠천도 사이의 바다)에서 총살된 후 수장당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창녕경찰서 근무자였던 김씨(김상낙)에 따르면, 합천경찰서, 의령경찰서, 거창경찰서원들은 후퇴하면서 창녕으로 합류하여 밀양으로 후퇴하였는데, 후퇴 전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있었고, 당시 사찰주임(정석주)이 CIC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전쟁사』에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하던 시기에 피난민으로 보이던 민간인들을 공격한 사건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월 3일 오전 10시 십이리에 도착한 17연대 2대대 7중대는 주민대표를 소집하여 적색분자 도는 수상한 자들을 색출하는데 협력하라고 지시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지방공비들이 비슬산으로 올라갔다는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를 쫓아가 월곡마을 뒷산 대나무 숲에 있던 월곡재실에서 잠을 자던 지방공비 40명을 사살하고 6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젖은 옷을 말리고 잠을 자고 있었으며, 전투경험이 없는 지방공비들로 아무런 경계도 세우지 않았고 대응사격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 2』는 이들이 전투경험이 없는 지방공비들이라고 했으나 같은 책에서 당시 17연대장 김희준 대령은 이들이 인민군 선발대라고 하고 있어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들의 상태와 정황으로 보아 피난민들이 공격을 당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7중대장 조경학 대위는 연대장으로부터 12리 일대에 원을 그리며 “이 일대의 빨갱이를 모조리 소탕하라”고 지시했으며, 6명의 포로 중에는 여순사건 14연대 군인출신과 12살 어린이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지상군 학살 및 미군폭격 사건>

 

피난민에 대한 이런 공격은 미군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국군이 위 십이리에서 피난민 공격을 하던 같은 날인 1950년 8월 3일, 남지읍 대곡리에 미군의 소개지시가 내려져 마을 주민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몸이 불편하여 이들을 쫓아가지 못한 노인 2명이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1950년 8월 9일과 10일에는 마을을 떠나라는 미 24사단의 지시에 따라 도천면 일대 천여 명의 주민들이 피난하기에 적당한 골짜기가 있는 어만리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8월 11일 아침 국군이 와서 다시 마을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떨어진 밀양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낙동강변으로 떠났다. 하지만 오전 10시 강변에 도착하기 전 도천면 논리 니미리둘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미 공군의 폭격이 가해졌다.

처음에는 폭격기 4대가 날아와 둑 위에 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를 피하려 피난민들이 흩어지자 이들을 쫓아가며 30분 동안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미 공군 8폭격대대의 폭격기록과 일치한다. 한편,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미 공군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었다. 근처 도로에 있던 미군과 국군이 이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8월 25일 새벽에는 창녕읍 여초리에 모여 있던 피난민과 주민들이 1시간 반 동안 미군의 기관총과 소총공격을 받아 이중 7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후 미군은 주민들을 모아 당장 마을을 떠나라고 한 후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9월 17일에는 성산면 방리 무태재 골짜기에서 피난하던 주민들 중 일부가 식량을 가지러 나갔다가 돌아온 후 이를 추격하던 미군들에게 3명이 총살당헀다.

창녕 영산면 부근에서는 미 24사단이 1950년 8월 5일부터 18일까지 전투를 치렀으며, 8월 31일부터 9월 9일까지 미 2사단이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솔터마을 뒷산

50

창녕경찰서

소개

1950. 8. 3.

남지읍 대곡리

2

미군

폭격

1950. 8. 11.

논리 니미리둘

미군

소개

1950. 8. 25.

창녕읍 여초리

70

미군

소개

1950. 9. 17.

성산면 무태재골짜기

3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