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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산청지역사건 종합

2013.07.26 17:5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619

<전쟁 전 피해>

 

험준한 지리산자락에 위치한 산청지역은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국군 5사단(사단장 김백일 대령)은 1949년 7월 초 3연대 2대대 소속의 1개 소대를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주둔시키고 1950년 1월말까지 산청, 함양, 하동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의심 또는 군의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49년 7월 16일 시천면 동당리 황용해가 군인들에게 끌려간 뒤 중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7월 18일에는 시천면 원리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하던 5사단 3연대 2대대가 시천면 신천리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마을 앞 강변으로 집결시킨 뒤 20여 명의 주민들을 살해했다. 같은 날 다른 군인들은 신천국민학교로 인근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소집한 후 학교 운동장에서 30여 명을 사살했다.

7월 22일에는 군인들이 다시 시천면 산간마을 주민 50여 명을 주둔지인 원리 덕산국민학교로 집결시킨 후 “반란군에게 등짐을 져주었거나 식사를 제공한 사람은 나오라”고 하여 선별된 주민들을 학교 뒷산에서 살해했다. 7월 24일에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천면 중산리 주민 6명이 살해당했다.

이렇게 3연대의 주둔 초기 인근 주민들이 거주지 부근이나 덕산국민학교로 연행되어 희생되었는데, 나중에는 산청군 단성면 주민들을 비롯하여 하동군 옥종면 등 20여 개 마을 주민 700여 명이 200평 규모의 농회창고에 감금되어 3연대 정보과 군인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희생당했다. 이들에 의해 선별된 주민들은 시천면 사리 남명 조식 묘비 앞 골짜기 뒷산와 덕산국민학교 뒤 원리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이 외에도 산청의 각 읍면에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7월 24일에는 삼장면 대포리 주민들이 가막골에서 군인들에게 희생되었으며, 8월 8일에는 황경준․황축천 형제 등 주민 수십 명이 산청읍 모고리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8월 19일에는 논에서 일하고 있던 오인호와 김천수·박고비 부부가 황매산 밑 장고개 배나무평지로 끌려 가 총살당했다.

9월 20일에는 산청읍 창고에 갇혀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이 산청읍 모고리 앞 야산 구덩이에서 기관총으로 총살당했으며, 11월 19일에는 차황면 장박리로 진입한 군인들이 주민 10여 명을 산청경찰서로 연행한 후 총살했다.

12월 28일에는 산청읍 범학리에 진입한 국군 5사단 3연대가 자신마을 김임갑 등 마을 주민 9명을 트럭에 실어 연행하여 산청읍 비료창고에 구금하였으며 이중 수십 명을 산청읍 모고리 야산에서 총살했다.

11월 9일에는 산청 오부면 수철리 주민 20여 명이 마을에 진입한 5사단 3연대에 의해 산청경찰서로 끌고 간 뒤 금서면 수철리 성재 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1950년에도 주민들의 희생은 계속되었는데, 1월 1일에는 산청 삼장면 주민 11명이 가막골에서 군인들에게 희생되었다.

이들 사건에 가담한 군인들 대부분은 당시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5연대 3대대 12중대 이씨는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사례는 산청과 함양뿐 아니라 구례, 곡성, 남원, 하동 등 지리산 일대에서 많이 발생했다”라고 증언했다.

같은 3대대 중화기 중대 출신 김씨(18)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소속 중대 150여 명이 주둔했다. 당시 5연대를 백골부대라고 불렀으며, 5연대 군인의 철모에 해골(백골)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라고 했다.

2대대 5중대 출신이었던 신씨(19)는 “하사관학교에서 새로 배치 받은 며칠 후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있다. 덕산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국군 3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출신이었던 신씨(19)는 “1949년 8월 말~9월 초 무렵 산청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할 때 분대원 전원이 소집되어 차로 10~1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민간인을 총검으로 척살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1대대 3중대 3소대(신병소대)원으로 학살에 가담했던 이씨(18)는 “당시 군인들이 주둔했던 학교에는 약 100명의 민간인들(대부분 장년과 여성)이 감금되어 있었고, 신병소대가 이들을 군용 GMC에 태워 산청읍 북쪽으로 이동한 후 주민들에게 삽을 주고 5~6개의 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신병소대장(육사 7기 김인식)이 피구금 민간인들을 구덩이 앞에 세우고 신병소대원들에게 전쟁 경험이 없으니 사람을 죽여 봐야 한다고 총검으로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신병소대원들이 머뭇거리자 소대장은 신병 중 최연소자인 이00에게 먼저 척살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00이 머뭇거리자 신병소대장은 권총을 빼들고 ‘네 놈들을 다 똑같은 놈들이다. 죽이겠다’라며 위협했다. 이에 이00이 피구금자 중 부녀자를 총검으로 척살하고 나머지 신병소대원들도 총검으로 주민들을 1인당 1명씩 척살했다.”라고 증언했다.

산청경찰서 근무자 강씨는 토벌작전에서 일반 주민들이 많이 희생된 이유는 군에서 내린 소개령을 안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소개령의 내용은 “가재도구 다 버리고 어디 지점으로 모여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터전을 버리고 가는 것도 어려웠고, 빨치산들이 빼앗은 경찰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을 출입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진짜 군경의 지시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주민들이 소개에 응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금서면 화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산청외공리현장.jpg

(산청 시천면 외공리 유해 발굴 현장)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산청지역의 민간인들이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전쟁 전 국군의 토벌사건에서 생존한 주민 또는 희생된 주민들의 가족들이었다.

산청경찰서 유치장에서 구금되었다가 갑으로 분류된 주민 56명이 7월 20일 본통고개에서 총살당했으며, 7월 28일경에는 산청읍 지리 안개골에서 30여 명, 산청읍 내리 쌀고개에서 30여 명이 학살당했다. 산청경찰서가 후퇴하던 7월 30일에도 주민 17명이 산청읍 내리 마당머리에서 살해당했다.

특무대원이었던 윤씨는 마지막으로 후퇴하면서 산청에서 진주 방향으로 나오는 골짜기에서 엎드려놓고 사살했다고 증언했으며, 산청경찰서 의용경찰 민씨에 따르면, 산청군 금서면 특리의 보도연맹원들은 산청경찰서로 넘겨져 5~6일 구금되었다가 트럭에 실려 생초면 본통고개에서 죽었다고 했다. 당시 생초면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1,400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부역혐의 피해>

 

경남지역 중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산청지역에서는 1950년 9월 하순 진주한 미 25사단에 의한 부역혐의사건에 의한 피해가 있었다. 당시 미군은 진주를 통해 산청으로 북진하던 중이었다.

당시 마을에 진입한 유엔군(또는 국군)은 인민군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을 색출하였다. 색출된 사람들은 산청읍 차탄리를 비롯해 인근 마을 사람들도 많았는데, 당시 트럭 두세 대에 사람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트럭에 실려 가던 사람들은 “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아나면 마을로 돌아와 반드시 알리자”고 했고, 학살을 피한 한 사람이 살아 돌아 와 이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가 알려준 희생 장소는 차탄리 인근 구시골이었다.

 

당시 차탄리에 진입하였던 군대는 미 9군단 25사단 35연대의 돌빈특수임무부대로 확인되는데, 이 때 국군은 없었고 함안₲군북에서 미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던 산청경찰 등 경찰병력이 있었다. 가해자가 국군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미군에 배속된 경찰이었거나 수복 시 부역자처리 업무를 맡고 있었던 특무대나 군정보대(G-2)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건 당시 트럭 두세대에 희생자들이 가득 했다는 증언으로 보아 희생자 수는 1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부역혐의 사건은 각 지서에 의해서도 발생했는데, 단성지서와 금서지서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단성지서는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경 단성면 당산리 후동마을 문홍조를 연행해 고문․살해했으며, 같은 날 오후 지서에 잡혀있던 다른 11명의 젊은이들을 총살해 함께 인근에 매장했다. 얼마 후 사건현장 한 구덩이에 12명이 매장된 것이 발견되었다. 금서면 매촌리 민대식은 자수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금서지서의 약속을 믿고 자수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매촌리 덕촌마을 위 안개골 수로에서 머리와 등에 총을 여러 발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11사단 사건>

 

빨치산의 활동지역으로서 전쟁 전부터 피해를 입었던 산청지역은 국군 수복 후에도 11사단의 토벌작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11사단 9연대는 1950년 12월 산청에 진입했다.

산청군 단성면 호리 마을로 진입한 국군은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부역자 수색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한윤생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군에 의해 끌려갔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주민은 “나락 베고 어느 정도 후에 국군이 들어 왔는데, 들어오면서 박격포와 총을 쏘면서 마을로 들어 왔습니다. 그 때 마을 노인 한 사람은 밭에 있다가 군인 총 맞아 죽고 소는 박격포 맞고 죽었던 일이 있습니다. 국군은 마을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앞 논에다 모아 놓고₲무슨 연설을 한 것₲같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궁둥이나 어깨 등을 마구 때리는 것은 예사였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마을로 들어 온 군인은 2~3명씩 짝을 이루어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하였고 한윤생을 끌고 나갔는데, 이후 살해되었다. 국군은 백곡국민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빨갱이 짓 한 사람, 산에 갔다 온 사람들 나오라”며 연설한 뒤, 해당 주민들을 끌고 간 후 학살했다. 마을에서 인민군 진주 시 적극적으로 부역한 3명은 이미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갔기 때문에 마을에는 없었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빨치산에 의해 거의 다 끌려 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토벌군은 단순 부역자까지 색출했다.

12월 16일 아침에 산청읍 쪽에서 토벌작전을 위해 밤머리재를 넘어오는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 삼장면 홍계리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이동 중인 9연대 2대대였다. 이이들은 마을에 남아 방앗간에 있던 강태수 등 2명을 사살하였다.

12월 19일 덕산면 원리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이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를 향해 이른 아침 총을 쏘면서 마을로 들어와 토벌작전을 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피해 산으로 도망가자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산으로 도망 가 피신해 있던 사람들을 끌고 중태를 지나 덕산으로 갔다. 내공리 가라골 하주익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9연대의 지리산토벌은 1951년 2월 들어 본격화되었다.

1951년 2월 5일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 50여 명은 하동군 악양면에서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진입하여, 마을을 방화하고 소개시키는 과정에서 내대리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희생시켰다. 당시 남성들은 일하러가고 마을에는 주로 노인․여성․어린이들만이 남아 있었다.

국군이 집집마다 불을 지르자 주민들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국군은 마을에서 뛰쳐나온 내대리 청내마을 김인구 등 주민 50여 명을 판기 청내마을 논에 집결시켰다. 이후 국군은 판기 청내마산 밑으로 집결된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눈이 어둡거나 중풍에 걸린 노인들은 국군이 집을 방화했는데도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여 희생되었다. 중풍에 걸린 한 노인은 국군의 지시에 따라 집에서 나오다가 국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렇게 희생된 판기마을 주민은 모두 4명이었다.

 

산청지역에서 발생한 11사단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거창‧산청‧함양사건”에 의한 것이었다.

 

1951년 2월 7일 새벽 5시경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출발한 9연대 3대대 10중대와 11중대 병력 중 1개 중대가 가현마을에 들이닥쳤다. 당시 진입한 군인들은 다발총을 들고 있었으며, “반동새끼 도망가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했는지 확인 필요) 가현마을 뒤쪽 솔밭 언저리에 도착한 군인들은 7시경부터 5~6명씩 한 조가 되어 40여 가구를 뒤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밖으로 내몰아 웃담의 한 집에서 가현마을 주민들을 다 모아 놓고 중대장이 연설을 했다. '검은 개‘, ’노란 개‘ 등의 말을 섞어 가면서 태극기를 보관하고 있는지, 군경가족 등은 손 들어보라는 둥 횡설수설하다가 주민 전원을 200여 미터 떨어진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갔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면서 양쪽으로 서고 뒤쪽을 받치면서 주민들을 압박했는데 군인들은 화랑부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군인들이 총대로 등을 떠밀고 때리면서 주민들이 낭떠러지로 몰아쳤다. 어린아이들이 떨어져 사람들 틈에 깔려 죽었고 그 어머니는 팔이 부러졌다. 군인들은 산제당 골짜기에 끌려온 주민들을 논바닥에 4열 횡대로 꿇어앉힌 뒤 무차별 사격을 가해 123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후 생존 주민들이 시신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장 생존자 허점달에 의하면, 일주일 뒤 군인들이 다시 가현마을에 돌아와 불탄 마을에서 지내던 주민들을 소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7발의 총알을 맞고 생존한 언니가 군인들에게 다시 사살당했다.

 

가현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 같은 시각인 오전 10시경 9연대 3대대는 산청 금서면 방곡리 방곡마을에 진입했다. 이들은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겠다”, “마을 좌담회를 열겠다”, “쓸 만한 물건은 다 들고 나와”라며 주민들을 집에서 내 몰았다.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가옥에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논바닥으로 내몬 군인들을 남녀로 구분하였고 남자들은 아래 논으로 내려가게 했다. 중대장인 듯한 군인이 주민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 식구들 중 젊은 놈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부녀자와 노인들만 남았다. 그 젊은 놈들은 다 어디 갔나?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릴 것이다.” 주민들의 대답이 없자 아래 논의 남자들을 향해 “모두들 다 뒤로 돌아 앉아.”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모두들 눈 감아!”하고 명령했다. 눈을 다 감았다 여겨지는 순간 무자비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다시 위 논으로 올라왔다. 죽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비명소리가 나는 순간, 이번에는 노인과 아녀자들, 어린이, 젖먹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군인들은 논밭에서 212명을 학살한 뒤 7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같은 날 오후 1시 30분경 가현마을 123명, 방곡마을 212명을 학살한 제3대대는 다시 아랫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로 내려갔다. 군인들은 가현, 방곡에서처럼 귀중한 물건과 가축들을 빼 낸 다음, 주민들을 동네 우물가로 모이게 한 뒤 20여 호를 태우고 6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을 완료했다고 생각한 군인들이 서둘러 자혜리 쪽으로 가고 있는데 시체더미에서 의식을 찾은 중년 여인이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이다. 이놈들아 죄가 있으면 대봐라 이놈들. 백정놈들!”하고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자 이 소리를 들은 군인들이 되돌아 와 여인을 쏘고 시체를 뒤져 확인 사살을 가했다.

 

방곡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제3대대 군인들이 1개 소대를 묵은터 마을로 보냈다. 묵은터 마을로 간 소대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며 본부대가 학살하는 것으로 알도록 공포탄을 동시에 쏘면서 마을 내 14가구를 모두 소각했다.

 

한편, 같은 날 아침 산청군 금서면 화계, 화산, 주상, 자혜마을과 함양군 유림면의 지곡, 손곡 등의 마을에 경찰, 향토방위대원, 군인 등이 조를 짠 듯이 나타나서 모든 주민들을 강 건너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로 모이라고 통지했다. 주민들은 겁에 질려 나갔다. 서주리에 가까운 지곡과 손곡마을 주민들은 쉽게 갈 수 있었으나 강 건너 산청군의 마을들은 얼음이 얼어있는 강 위를 건너야 했다. 오전 11시경 5개 마을 1천여 명 주민들이 서주 강변 둔치에 모이자 군인들은 남자와 여자를 먼저 구별해 앉혔으며 이어 각각 노인과 청장년, 어린이로 구별하여 앉혔다. 나누어진 주민들을 상대로 군경 2명이 한 조가 되어 군경 가족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선별했다. 오후 4시경 가현, 방곡, 점촌, 묵은터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 군인들이 서주리에 도착해, 선별되지 않은 주민들을 유림지서 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선별된 주민들은 군인들에게 둘러싸였다. 3대대 군인들은 젊은 장정 10여 명을 미리 끌고나와 서주리 엄천강 둔덕에 자기들의 무덤이 될 교실만한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 후 주민 310여 명을 구덩이에 몰아넣었고 이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으며, 박격포를 발사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처참하게 학살했다. 학살을 마친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2월 8일 밤 생초국민학교를 숙영지로 택하고 학살한 마을에서 끌어온 가축을 잡아 작전 축하잔치를 벌였다.

 

거창․산청․함양사건에서 알려져 있지 않으나 CIC가 1951년 3월 작성한 문서철에 의하면, 2월 9일에도 9연대 일부 군인들이 산청 오부면에 진입하여 부곡리에서 주민 30여 명을 학살하고 100여 가구를 불태웠다.

 

거창에서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신원면 주민 718명을 학살한 9연대는 다음날인 1951년 2월 12일 산청군 오부면 대현리 마을에 들어와 모든 집에 불을 질렀고, 닥치는 대로 사람과 짐승을 모두 사살했다.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 등이었는데, 군인들은 눈에 띄는 사람들은 모두 사살했다. 학살을 마친 토벌군은 다시 신원면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주민은 양경순 등 10명이다. 사건발생 10여 일 전인 1951년 2월 초순 경, 마을에 진입한 9연대는 군경가족을 따로 구분한 후 연설만 하고 간 적이 있었다. 신원면 대현리를 착각하여 사건 지역에 진입한 군이 무전 연락을 받고 학살직전에 퇴각했던 것이라고 알려졌다.

 

1951년 3월 15일에 산청군 오부면 부곡리 마을에 재차 진입한 9연대 1대대 1중대와 2중대는 마을에 남아 있던 홍창곤, 홍진화, 김종분 등 3명을 끌고 갔다. 당시 김종분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토벌대는 이들 3명을 끌고 거창군 신원면 방향으로 가던 중 홍창곤, 홍진화를 오부면 중촌리 오휴부락 오리밭골에서 걸음이 느리다는 이유로 부대장의 지시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종분은 거창의 신원국민학교까지 끌려갔다가 군인 한 명이 “눈치가 그렇게 없냐, 빨리 피하라”는 말을 듣고 군인들이 집합하느라고 어수선할 때 나무더미 밑에 숨어 있다가 혼자 산을 넘어 새벽에 마을로 되돌아왔다. 김종분에 의해 두 사람의 사망소식이 마을에 전해지고, 두 사람의 시신은 다음 날 마을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1951년 국군 11사단 9연대에 의한 토벌작전으로 주상리로 소개당해 생활하던 금서면 오봉리 주민 서금득, 서판준 두 가족이 오봉리 거주 당시 빨치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금서면 화계지서 경찰 두 명에 의해 지서로 끌려가 한 달 가량 고문 등을 받다가 산청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얼마 안 지나 끌려 나가 행방불명되었다. 끌려 나간 날짜는 서판준의 경우 9월 10일, 서금득은 10월 11일이었다.

 

<8사단 등 사건>

 

11사단의 토벌작전이 끝난 이후의 산청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8사단과 토벌경찰대에 의해 계속되었다.

산청에서는 시천면 내대리 판기마을 박우문과 동생 박원희가 1951년 12월 9일 마을에서 1km 정도 떨어진 경명도 야산 골짜기 목공예 작업장에 있었다. 같은 날 오후 2시경 국군 10여 명이 경명도 야산 작업장에 들이닥쳤다. 국군은 박우문․박원희 형제를 작업장 앞으로 끌어낸 후 민간인임을 알고도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3~4발의 총격을 가하여 살해했다. 한편, 박우문의 동생 박근생도 박우문과 박원희가 희생된 지 열흘 정도 후인 1951년 12월 20일 내대리 야산에 일을 하러갔다가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위 박우문이 희생된 다음 날인 1951년 12월 10일 국군이 오전 내대리 청내마을에 들어와 정오교, 같은 마을 이영수․하점구 등을 총살했다. 정오교의 시신은 같은 날 오후 그의 동생 정대교에 의해 수습되어 청내마을 인근에 매장되었다. 이영수와 그의 아내 하점구의 시신도 이 사건 직후 발견되었다. 11월 21일에는 밤에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마을 김점순이 사찰유격대의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8사단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개인 감정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례가 확인되었다.

산청군 산청읍 묵곡리에 거주하던 문홍택, 문홍각 등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할 때 1차 소집에서 풀려난 후 도피하였다. 경찰은 인민군이 산청군에 진입하기 며칠 전 다시 이들을 다시 소집하려고 했지만 이미 도피하고 없자 가족들을 연행한 후 대살(代殺)했다. 문홍각은 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51년 12월 24일 친척집에 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특무대원들에게 사살되었다. 희생자의 친척인 문정칙은 ‘문홍각을 사살한 특무대원이 희생현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문홍각의 머리를 절단한 후 지게에 싣고 따라오라고 하여 산청군 소재 특무대원의 숙소로 가지고 갔다.’고 했다. 이후 문홍각의 부친은 벼 두 가마를 주고 문홍각의 머리를 찾아와 매장하였다. 문홍각을 사살하던 현장에 있던 특무대원 윤길상은 ‘산청읍 묵곡리에 사는 문모(某)가 친척집에 나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본인과 강진익, 이만호 등 4명이 함께 사살했다.’고 진술했다. 문홍택과 박氏도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도피하던 중 1952년 3월 9일 문홍택의 처남 임상구의 주선으로 자수를 했는데,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연행한 후 실종되었다.

특무대원 윤씨는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지방 빨갱이 7명이 아버지를 잡아다가 창고에서 몽둥이로 팼는데, 집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며, 부친을 사망하게 한 가해자 중 2명을 잡아서 직접 없앴다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산청군 산청읍 묵곡리에 사는 문모가 도피하였는데 친척집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현장에 잠복했다가 사살했다. 그때 특무대원이었던 나와 15연대 경비대 출신 강진익, 금서면에 사는 이만호 등 4명이 함께 있었다. 그 집안 사람들이 빨갱이 핵심들이었는데 전매서장하던 사람, 선생하던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묵곡리에서 사살한 문모(某)의 목를 자르지 않았으나 우리 동네인 산청읍 정곡리에 살던 강씨 목을 자른 적은 있다. 사찰계 형사들이 입산해 있던 강씨가 집에 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대기하고 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잡았다.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무급으로 8~9년 동안 특무대 문관으로 있었다.”라며 가해사실을 인정했다. 이 행위는 과잉살해로서 전쟁범죄의 잔학행위에 해당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7.16.~18.

시천면 신천리 등

50

5사단

전쟁 전

1949. 7.~1950. 1.

남명골짜기,원리골짜기

700

5사단

전쟁 전

1949. 7.24.~8.19.

삼장면 가막골 등

5사단

보도연맹

1950. 7. 20.~30.

본통고개 등

130

산청경찰서

부역

1950. 9. 말

차탄리 구시골

100

미군

부역

1950. 9. 말

단성면 등

10

단성지서 등

토벌

1950. 12. 16.~19.

단성면 등

10

11사단

토벌

1951. 2. 5.

시천면 내대리

50

11사단

토벌

1951. 2. 7.

가현마을 산제당골

123

11사단

토벌

1951. 2. 7.

방곡마을

212

11사단

토벌

1951. 2. 7.

점촌마을

60

11사단

토벌

1951. 2. 7.

함양군 서주리 둔덕

310

11사단

토벌

1951. 2. 9.

오부면 부곡리

30

11사단

토벌

1951. 2. 12.

오부면 대현리

10

11사단

토벌

1951. 3. 15.

오부면 부곡리

2

11사단

토벌

1951. 12. 9.~20.

시천면 내대리

6

8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