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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3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481

<전쟁 전 피해>

 

1946년 9월 23일 총파업시기에 부산에서도 모든 학교가 파업에 참여했으며, 10월 9일에는 시위군중 24명이 피살당했다.

 

<형무소사건>

 

부산지역은 인민군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으로 이승만 정부의 실질적인 마지막 보루였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에도 인민군의 점령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산지역의 주민 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까지도 피해를 입었다.

3사단 23연대 군인 조씨(조동환)에 따르면, 부산지구 헌병대 70중대가 부산을 관할하기 전 국군 3사단 23연대가 주둔하였으며, 당시 김종원이 헌병부사령관이었고, 그전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이어서 그를 ‘소통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용가능한 인원이 1,500여명(유엔 민사처는 706명으로 판단했다)이었던 부산형무소에는 1949년 8월 1,977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전쟁 직전에 10명이 최대 정원이었던 감방에 20~30명이 수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실제 그 수는 3천6백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형무소 『재소자인원일표』에 의하면, 1950년 5월 좌익사범으로 분류된 재소자는 724명이었다.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26일부터 30일, 8월 2일부터 3일, 9월 25일 세 차례에 걸쳐 최소 1,500여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이 부산지구CIC, 헌병대, 부산경찰서, 형무관에 의해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부산 오륙도 해상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부산형무소 교정통계 등 기록에는 형무소로 연행되었다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이 92명으로 확인되는데, 이를 근거로 한다면 당시 희생된 부산형무소 재소자는 최소 1,400여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시기였던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교정통계에 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고 기록된 468명이 이 시기에 희생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이송된 수감자는 없었다는 형무관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었으며, 당시 부산형무소에서 이송할 다른 형무소는 없었기 때문이다.

2차 시기인 8월 2일부터 3일까지 재소자인명부에서 109명이 헌병대와 CIC에 인계된 기록이 확인된다. 기록의 109명은 기결수 28명, 미결수 74명, 보도연맹원 7명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형무관들은 이 시기에 20명씩 10트럭 정도가 나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3차 시기인 9월 25일에는 재소자인원일표와 교정통계로 보아 이송되었다는 1,450명 중 1951년 생존이 확인되는 507명을 제외한 943명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또는 예비검속 사건>

 

부산지역에서 부산형무소로 예비검속된 주민들은 4,253명으로 나타난다. 부산형무소 교정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감방과 형무소 내 공장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CIC에 의해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호명되어 불려나가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등에서 총살되었다. 기록에는 4,253명 중 3,655명이 출소했으나 이 중 92명은 총살당했음이 확인되므로 실제 살해당해 출소로 기록된 주민들은 더 많을 것이다. 나머지 598명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부산형무소 계호과 김씨(김병립)에 의하면, 7월 말부터 부산, 김해, 양산, 동래, 울산 등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이 많았는데, 부산철도청, 조선방직의 보도연맹원들이 단체로 수감되었으며, 형무소 공장과 부산진역 근처 미곡창고에 수용되었다가 헌병들이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한편, 희생자들이 국민보도연맹원 외에도 보편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증언이 있다. 부산지구 헌병대 양씨(양승호)는 부산지역 CIC가 제5열 조사를 담당했으며, 좌익들에 대한 즉결처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부산형무소 계호과 김씨(김병립)에 따르면, 9․28 수복 전 재판과 사형집행이 있었는데, 당시 형무소에는 군인이 상주했으며, 영관급 헌병이 지휘하였다. 김종원이 형무소를 방문했었으며, 당시 CIC대장은 노덕술이었다고 한다.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학살 현장을 목격한 주민 이윤관의 증언에 의하면, 희생자들을 10여 명의 군인들이 구덩이 위에 걸쳐놓은 나무위에 4명씩 꿇어앉히고 등 뒤에서 총을 쐈다. 총을 맞은 사람들은 총격에 의해 구덩이로 떨어졌다. 부산형무소 계호과 김씨(김환태)에 따르면, 1950년 후반과 1951년경 부산형무소 경운지(현 구덕운동장 뒤편)와 장림에 구덩이를 몇 개 파서 80명 정도 매장했다고 한다.

부산형무소 계호과 의무실 박씨(박제문)에 따르면, 9․28 수복 전 헌병들이 사상범들을 끌어내어 광안리 등에서 총살했는데, 9․28 수복 전에 미군의 항의로, 대통령 집무실에서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 죽이는 것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전쟁 시기에 사상범을 형무소 강당에서 조사하였으며 1․4후퇴 이후 임시사형집행소를 만들어 사형시켰고, 부산형무소 공동묘지(현 민주공원)에 매장했다.

부산형무소 계호과, 특별공격대, 의무과 조씨(조치현)에 따르면, 1․4후퇴 이후 경기도, 충청도 좌익 재소자들이 부산으로 이감되었는데 인천에서 LST를 타고 오다가 죽은 재소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을 부산 앞바다에 버렸다가, 문제가 생기자 그 후 부산형무소 경운지에 매장하였다.

1․4후퇴 이후 임시 사형집행장에서 사형을 집행했는데, 하루에 58명이 집행되기도 했다. 특별조치령으로 사형 언도 받은 9명을 버스에 실어 창원 웅천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구덩이에 묻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에는 여러 종류의 살인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501특무대는 동광동 부산호텔 옆 동광초등학교에, 15헌병대는 양정, 한미합동수사대는 중앙동에 있었다. 314특무대도 있었다.

집단희생지인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에서 유해가 발굴되었으나 수습되지 못했다. 해운대구 장산굴짜기는 현재 해운대 신시가지가 되어 대우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 공사 당시 많은 유골이 발굴되었다고 하나 현재 확인할 방법이 없는 형편이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형무소

1950. 7. 26.~30.

사하구 동매산 등

468

CIC 등

형무소

보도연맹

1950. 8. 2.~3.

장산골짜기 등

109

CIC 등

형무소

보도연맹

1950. 9. 25.

오륙도 해상

943

CIC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