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경주지역사건 종합

2013.07.08 15:3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626

<전쟁 전 토벌작전 피해>

 

경주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진행된 토벌작전과 1949년 7월경 집중된 토벌작전에 의해 주민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1948년 4월 1일에는 남산동 손장호 등 주민들이 경주 내동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당시 주둔하던 부산(대구) 6연대 토함산 지구 공비토벌대에 의해 하천에서 총살되었다. 총살은 불국사 내동지서 옆 하천에서 공개적으로 저질러졌는데 당시 희생자들은 나무에 묶인 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949년 6월 19일에는 감포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팔조리 추월재에서 희생되는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경주경찰서와 각 지서에 의해 희생되었다. 1949년 7월 20일에는 경주경찰서 감포지서로 연행되었던 감포읍 전촌리 정의선이 집 뒷산에서, 정의선의 형 정호식은 1950년 4월 11일 감포지서로 연행된 후 4월 14일 감포읍 나정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정호식은 일제강점기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같은 시기 민보단에 의한 피해사실도 확인된다.

경주 내남면 명계리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인척 22명,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이 1949년 7월 30일과 8월 1일 이틀에 걸쳐 경찰 이홍열, 면 민보단장 이협우 등 10여 명에게 총살당했다. 이듬해인 1950년 1월 4일에는 내남면 덕천2리 주성조 일가족 8명이 민보단에 의해 집에 갇힌 채 총을 맞고 불태워졌다. 희생자의 유족인 내남면 명계리 김하종 외 74명의 주민들은 4‧19혁명 후 경찰관과 이협우 등 민보단원들이 김인수 외 29명을 학살하는 등 도합 98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며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경주지역은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음에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주경찰서 역시 경북지방경찰국으로부터 전쟁발발 직후 요시찰대상자에 대한 연행지시를 받았으며, 경주경찰서장이 사찰계를 통해 각 지서로 이들을 연행하라는 전통과 공문을 내려 보냈다.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유치장에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우체국 인근의 OK캬바레와 경주역사, 그리고 각 지서 유치장에도 잡혀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이 영덕에 진입하자 경주시 내남면으로 끌려가 경찰과 CIC 경주파견대에 의해 처형되거나 감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천북면처럼 지서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을 직접 처형한 경우도 있었는데, 희생지는 내남면 노곡리 계곡, 천북면 화산리 계곡, 건천읍 송선리 계곡, 울산시 강동면 신명리 계곡, 감포 앞바다 등이었다.

 

총살에 동원되었던 경주경찰서 경비계 근무자 한씨(한신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내남면 현장에 동원된 사실이 있으며 첫 번째 동원되었을 때는 어느 날 밤이었다. 경찰서에 구금된 남로당원들을 대구형무소로 이송하는 트럭에 탑승하도록 차출되었고 실탄 50발을 지급받았는데 트럭이 도착한 곳은 대구형무소가 아닌 내남면 노곡동의 골짜기였다. 당시 현장은 사찰과장인 박용래가 지휘했으며 나에게는 5명의 여자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머뭇거리고 있자 다른 동료 경찰이 그 여자들을 사살하였다. 이후 사찰계가 돈을 받고 처형될 사람들을 빼돌린다는 정보가 당시 월성군청에 주둔 중이던 CIC대장에게 들어갔고 그 이후부터 처형자에 대한 관리와 지휘는 CIC가 담당하였다. 두 번째 현장에 동원되었을 때는 낮 시간이었으며 현장에는 이미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당시 현장은 이북 출신의 CIC대장이 지휘하였는데 그 날 처형된 사람은 65명 정도였으며 처형자 중에는 15세도 안 되는 소녀도 있었다. 처형될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이 뒤로 묶인 채 뒤에서 총격을 받고 구덩이 속으로 쓰러졌으며 몸속 장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CIC대장은 한 차례 총격이 끝나면 ”총을 맞지 않은 사람은 부탁을 받아서 일부러 쏘지 않은 것이니 일어나라“고 하였으며 이 말을 듣고 구덩이 속에서 일어난 사람은 CIC대장이 삽으로 머리를 내리쳐 죽이기도 하였다. 처형이 끝나면 다시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묻었는데 당시 유치장이 차면 현장으로 끌고 와 처형을 하였으며 다른 동료들도 몇 차례 현장에 동원되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김씨(김상록)는 “전쟁 직후 경주경찰서 남쪽 운동장에 보도연맹원들이 집결한 채 트럭에 올라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배에 실려 감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산내면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이씨(이임출)는 “산내면 의곡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우 재판을 받으러 간다며 GMC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출발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이후 건천에서 산내로 넘어가는 감산재라는 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최씨(최기성)는 경주역에서 보초를 서면서 감금된 100여 명의 주민들을 감시했는데, 모두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미군폭격 피해>

 

경주 시내 중심지는 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했으나 포항 경계지역에서 형성된 전선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1950년 8월 9일 인민군 12사단이 영일군 기계면(현재 포항시 북구) 북쪽에 진입했으며 8월 14일까지 안강과 기계를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었다. 인민군의 진입 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가까운 경주 강동면 안계리 기계천 변으로 피난을 갔다. 이들이 이곳으로 피난한 이유는 기계천 변이 완전히 노출된 곳이므로 피난민 식별이 쉬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8월 14일 오전 1대의 정찰기가 2바퀴 돌며 주민들을 살펴보고 돌아간 뒤 은색의 비행기 편대가 나타나 번갈아 가며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들의 피난민 공격은 20분간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최소 35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국군 수복 시기 좌익혐의 피해>

 

경주는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이 아니므로 부역혐의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좌익이었다는 이유로 희생된 주민들이 있었다. 형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동생 김외권이 1950년 9월 25일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이상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집단희생사건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4. 1.

내동지서 옆 하천

6연대

전쟁 전

1949. 6. 19.

팔조리 추월재

30

경주경찰서

전쟁 전

1949. 7.~1950. 1.

내남면 명계리 등

98

경찰, 민보단

보도연맹

1950. 7.

내남면 노곡리 등

200

C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