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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포항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2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578

<전쟁 전 피해>

 

포항지역에는 전쟁 전부터 좌익을 토벌한다며 3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포항에서는 영덕 농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영일군 구룡포읍 강사리 서병환이 1949년 3월 14일 대보지서 순경과 구룡포에서 온 7~8명의 청년단원들에게 연행되어 대보리 솔백등에서 피살되었다.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포항 장기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장기면 하천변에서 3사단 22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총살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포항경찰서와 포항 해군경비사령부, 국군 3사단, 대한청년단 등이 7월 20일부터 8월 초까지 주민들을 포항경찰서 유치장, 대보지서, 구룡포지서, 구룡포읍 창고, 모포지서, 장기지서, 대보국민학교, 장기면 읍내리 양조장 등에 예비검속하거나 보도연맹 사무실에 소집하였다가, 영일만 해상, 구룡포 앞바다, 감포 앞바다 등에서 수장하거나 포항의료원 뒷산, 연화재길, 달전고개, 수도산, 고디굴, 월산골짜기, 수성골짜기 등에서 총살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7월 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의 좌익분자 처형 명령서를 받은 후 포항․경주․영덕 경찰서의 협조를 받아 명부에 올라있던 각 경찰서 관할지역 주민 400~500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이종환 포항경찰서장, 이강학 경주경찰서장, 박주현 영덕경찰서장, 포항경비부 정보참모 차병엽 중위, 헌병대장 고윤석 중위, 정보장교 박재옥 중위 등이 이중 200여 명을 ‘처형대상자’로 분류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7월 20일 군함 3척에 처형대상 주민을 태우고 영일만 장기등대 동쪽 3~5km 지점 바다로 나가 총살한 후 다시 떠오르지 못하도록 돌을 매달아 수장했다. 총살은 해군 장병과 경찰이 함께 저질렀다.

포항경찰서로 연행되지 않은 주민들은 7월 17일경 포항시보도연맹 사무실로 소집되었다. 이들은 영일만 해상에서 수장되지 않고 7월 말에서 8월 11일 사이에 포항 수도산, 연화재길, 포항의료원 골짜기, 달전고개 등에서 총살되었다. 생존 보도연맹원 김씨(김미자)는 당시 상공회의소 건물에 모인 주민들이 수백 명을 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놓고 포항시보도연맹 간사장 박일천과 민간인 복장을 한 다른 사람들 여럿이 명단을 비교해가면서 사람들을 트럭에 실어서 보냈다고 한다. 트럭에는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싣기 위해 바닥에 차례로 사람들을 눕게 한 후 그 위에 가마니를 하나 깔고 다시 사람들을 눕게 하는 식으로 여러 겹으로 쌓아서 실었다. 이렇게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포항의료원 뒷산에 길게 구덩이를 파고 죽 세워 총살했다고 한다. 포항의료원 골짜기에서 희생된 수는 최대 2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포항경찰서로 이송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학살당헀다.

구룡포(대보)지서는 구룡포읍 주민들을 고디굴과 구룡포 앞바다에서 총살하거나 수장했다. 고디굴에서는 8월 9일에서 8월 12일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아 살해했는데 주로 야간에 총을 쏘다보니 옆의 사람에게 가려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고디굴에서 전쟁 발발 후 첫 희생 사건이 발생한 8월 9일은 포항 북부 기계면이 인민군에 점령되고 포항시내 역시 함락의 위기에 놓인 때였다. 학살은 8월 12일까지 수차례 있었는데, 그 동안 희생된 주민은 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외에 구룡포 하정2리 앞바다에서 수장된 희생자들도 있었다. 8월 1일부터 2일 사이에 대보국민학교로 소집된 주민들이 일주일 뒤인 8월 9일 구룡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당시 대보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헌병들이 김상대 등 40여 명의 주민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인원을 확인하였다. 헌병들은 트럭에 사람들의 손을 뒤로 묶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게 하고 헌병들이 총과 몽둥이를 들고 감시하였다. 강사1리에 차를 세워놓고 골짜기로 올라간 후 총소리가 몇 번 났는데, 이순근 등이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살아 끌려왔다. 헌병들은 다시 이들을 트럭에 태워 구룡포 항으로 끌고가 어선을 징발하여 희생자들의 손을 뒤로 로프로 묶은 채 커다란 돌을 여러 개 싣고 나갔다. 배가 40여 분 후 돌아올 때는 텅 빈 상태였다. 옛 수협 공판장 뒤에는 CIC 사무실이 있었다.

 

<미군폭격 피해>

 

포항과 인근지역에서 전투를 치른 부대는 3사단(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이었으며, 기계면과 안강면에서는 수도사단(제1연대, 제18연대 등)이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4일까지 전투를 치렀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포항지역의 주민들이 받은 가장 큰 피해는 미 해군 함정의 포격과 미 공군의 폭격이었다.

8월 16일 흥안리와 인근 곡강천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이 항공모함 필리핀 씨(Philippine Sea CV47)호에서 출항한 항공기들의 폭격에 의해 희생되었다. 당시 폭격기들은 네이팜탄을 비롯한 폭탄을 10여개 투하했으며 이를 피하는 주민들에게 20여 분간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은 포항인근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된 국군 3사단의 철수작전을 엄호하기 위한 예방폭격작전의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당시 흥안리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피난하고 있었으며, 곡강천 변에서는 3,000여 명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이중 100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같은 날 북송리에서도 미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오후 1시경 30분간 저질러진 이 공격으로 마을 주민 53명과 인근 지역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당시 마을에서는 영덕 전투에 강제노역 다녀온 주민들의 생환을 축하하여 돼지를 잡고 있었다.

흥안리가 폭격 당한 뒤 흥안리 남쪽의 천마산이 격전지가 되자 마을 주민들은 다시 봉임불해변(현재 칠포해수욕장)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곳 역시 10여 일 뒤 기총사격을 당해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당했다.

8월 23일 미 전투기가 송도해변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여 피난민 여러 명을 살해했다.

8월 27일 오전 10시 미 공군 18전폭전단 39폭격대대 전투기가 흥해읍 용한리에서 칠포리에 이르는 해변에서 피난하던 천여 명의 주민들을 폭격하여 100여 명을 살해했다. 피난민들은 지난 8월 16일 흥안리 폭격 이후 포항지역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해변으로 나온 주민들이었다. 미군은 폭격 전 L-19정찰기 1대로 정찰비행을 했는데, 이를 본 피난민들은 민간인임을 알리기 위해 하얀 천을 흔들었다. 이를 본 정찰기가 돌아가고 10분 후 폭격이 시작되었다

8월 29일에는 낮 12시와 오후 5시 두 차례 미 전투기가 흥해읍 칠포리 마을과 해안을 폭격하여 주민 30명이 사망했다. 낮 12시에는 정찰기가 지난 후 전투기 4대가 나타나 왕복하면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20명이 사망했으며 200여 채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폭격이 끝나자 피신했던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불을 끄고 시신을 수습했으나 오후 5시 다시 나타난 전투기들의 공격으로 10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남송리 일대도 정찰기가 떠난 후 미 전투기가 나타나 폭격하여 피난민 7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미 전투기가 흥해읍 남송리 일대를 폭격하여 이곳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망천리 주민 7명인데, 여성 또는 15살 미만 어린이였다.

전투를 피하기 위해 8월 20일 이후 북구 환호동, 죽천동 등 주민 1,000여 명이 여남동 송골계곡 해변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시야에 완전히 노출된 송골계곡 해변 앞 영일만에는 미군 함정들이 떠 있었고 미군 정찰기들 매일 활동했으므로 피난민의 존재에 대해 미군들이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은 10여 일 동안 무사히 피난 생활을 했으나 9월 1일 오후 2시 영일만 해상의 미 함정 3척으로부터 30여 분간 함포사격을 받았다. 당일 현장사망자만 100여 명에 이르며 수일 내 사망한 주민까지 합치면 수백 명에 이른다는 증언이 있으며, 이로 인해 사망자 51명, 부상자 19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9월 5일에는 정찰기 L-19의 정찰 후 나타난 미 전투기 2대가 신광면 마북리를 폭격하였다. 당시 전투기는 20분 동안 폭탄 5개를 투하했고 우물가에서 쌀을 씻던 여성 10여 명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주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9월 8일 남쪽에서 날아 온 정찰기가 지나간 후 미 전투기 4대가 청하면 이가리와 월포리에서 지내던 피난민과 주민을 폭격하였다. 당시 청하면 북쪽과 영덕방면에서 내려온 피난민과 주민은 모두 800여 명이 있었으며 이 폭격으로 이가리 주민 10여 명과 해변에 있던 피난민 50여 명이 사망했다.

9월 13일 미 전투기 2대가 연일읍 유강1리 마을과 철로 터널을 폭격했다. 여러 명이 사망하고 50여 호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피난을 떠나 형산강 제방에서 300여 명이 움막을 짓고 지내야 했다. 9월 18일 미 전투기가 다시 이들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살해했다.

9월 22일(또는 23일) 미 전투기가 송라면 광천리와 방석리를 폭격하였다. 이로 인해 광천리 주민 40여 명과 방석리 주민 5명이 사망했다. 정찰기가 간 후 나타난 전투기 4대는 마을은 공격하지 않고 광천 냇가에서 피난하던 주민들만 공격했다.

이 외에도 같은 시기에 청하면 유계리, 신광면 만석리 주민들이 미 전투기의 공격으로 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포항지역 주민들은 ‘장사리 상륙작전’으로 알려진 국군의 상륙작전 후 피해를 입기도 했다.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 당시 송라면 지경리 주민들이 상륙하던 국군에게 희생되었다. 당시 장사리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유엔군 군함(영국 구축함 Q34호)의 함포사격이 영일군 송라면 지경리 거주지까지 날아오자 박순이 등 마을 주민 20여 명이 이를 피해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마을 뒷산 절벽 아래로 피난을 갔다. 여기는 절벽에 가려지므로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포격이 멈추고 국군이 송라면 지경리에 상륙했으며, 대부분이 학도병이었던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가 지경리 마을을 수색하였다. 남정면 장사리에서 피난 중이던 주민들을 발견한 수색대원 3명은 인민군 복장을 하고 얼굴에 위장칠을 하고 있었으며 인민군 총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군인들은 5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피난민들에게 총을 겨누며 “손들고 나와”라고 하였다. 그러자 피난민들은 지시에 따라 손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20여 명의 피난민들이 나오던 중 한 군인이 피난민을 향해 정조준 하여 2~3발의 총을 쐈으며, 이 총격이 박순이의 이마를 관통한 후 다시 그 뒤에 있던 한 할머니(박순이의 사돈)의 팔을 관통하였다.

「포항경찰연혁사」에는 인민군 점령기에 포항지역 인민위원회 등 좌익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주민들이 3,717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인민군이 포항지역 일부에 진주한 기간은 한 달 정도였으며, 대부분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안정적인 점령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역자의 수가 이 정도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11. 19.

장기면 하천변

3사단

보도연맹

1950. 7. 20.

영일만 장기등대

200

포항경비사령부

보도연맹

1950. 7.말~8. 12.

포항의료원 골짜기 등

300

포항경찰서

폭격

1950. 8. 16.

흥안리, 북송리

200

미군

폭격

1950. 8. 23.

송도해변

미군

폭격

1950. 8. 27.~29.

칠포리 해변 등

150

미군

폭격

1950. 9. 1.

여남동 송골계곡

수백

미군

함포사격

폭격

1950. 9. 5.

신광면 마북리

3

미군

폭격

1950. 9. 8.

이가리 해변

60

미군

폭격

1950. 9. 13.~18.

유강리

20

미군

소개

1950. 9. 15.

송라면 지경리

1

제1유격대대

장사리상륙작전

폭격

1950. 9. 22.

송라면 광천리 등

50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