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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의성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1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581

의성부근에서는 국군 8사단이 1950년 8월 1일부터 13일까지 전투를 치르고 후퇴하여 9월 4일까지 수도사단과 함께 보현산 부근에서 전투를 치렀다. 8사단은 다시 영천 부근에서 9월 5일부터 9월 13일까지 6사단, 7사단 등과 함께 전투했다.

한편, 국군 6사단은 의성 용기리 부근에서 8월 2일부터 12일까지, 8월 29일까지 군위에서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는 영천 신녕면 부근에서 전투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 의성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의성경찰서로 소집‧연행되었으며 이들은 인민군의 남하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의성경찰서와 산하 각 지서에 의해 희생되었다. 대량 학살이 본격화된 때는 인민군의 경북지역 진입 시기를 앞둔 시점이었는데, 이 시기의 사건은 군의 주도하에 자행되었다.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단밀면 양봉석 등 9명은 의성경찰서에 연행당한 후 7월 15일 의성읍 함박골에서 총살당했다. 의성경찰서 사찰계 근무자 유씨(유갑하)에 따르면, 당시 의성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은 경찰서 뒤 골짜기인 한티재 아래 여시개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총살은 사찰계가 주도하였고, 총살현장에는 유치장 간수와 경비대, CIC가 같이 있었다.

다인지서는 7월 24일 2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을 연행하여 피밭제에서 총살했으며, 단북지서는 7월 25일 단북면 김달용 등 11명을 지서로 연행하여 안계면 또는 의성쪽에서 총살했다. 안계면 김호영 등 주민 50여 명은 7월 24일 군인들에 의해 연행당한 후 비안면 짝두골에서 총살당했고, 같은 시기에 안평면 주민 오근수 등 8명이 안평지서에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7월 24일경 의성지역에는 수도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외에 국민보도연맹원이 아니었음에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주민들이 있었다. 8월 9일 금성면 개일리 주민들이 마을 구장 박정갑과 국군 3명에 의해 좌익혐의로 잡혀가 금성면 개일2리 갑장골에서 총살당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았던 의성지역의 주민들이 수복하던 국군과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9월 24일 의성에 진입한 국군은 8사단 21연대(연대장 김용배)였는데, 이들에 의한 피해는 다음과 같다.

신평면에서는 안동군 서후면 명리에 거주하던 권구준이 9월 26일경 시집간 딸의 집이 있는 경북 의성군 신평면 청운2리(속칭 막시터)에 갔다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권구준 외에도 마을주민 4명이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춘산면에서는 9월말 북진하는 1개 소대 규모 국군이 인민군에 협조한 주민을 조사하던 중 마을로 내려오는 백용암과 김영길을 마을어귀 들판 빙계2리 거느골에서 총살했다. 그 후에도 피난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총살당할 것을 염려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산속에 숨어 지냈다.

 

<미군폭격 피해>

 

의성에서는 1‧4후퇴시기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1951년 2월 4일 오전 9시 잠자리 모양의 정찰기가 정찰한 후 전투기 4대가 금성산 방면에서 날아 와 금성면 제오리 마을에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모두 17명의 주민들이 사망했다. 2010년 보수화 된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5.~24.

의성읍 함박골 등

100

수도사단 등

소개

1950. 8. 9.

금성면 갑장골

국군

부역

1950. 9. 26.경

신평면, 춘산면 등

국군

폭격

1951. 2. 4.

금성면 제오리

17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