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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전쟁 전 피해>

 

1946년 10월 7일 대구 10월 항쟁의 시기에 마산에서 6,000여 명이 시위에 나서자 미군은 이들에게 발포하면서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8~15명이 살해당했으며 150여 명이 체포당했다.

마산에서는 1949년 8월 12일 마산경찰서에 연행당해 감금당해 있던 최병용 등 주민 30여 명이 노산에서 집단학살당했다.

개인테러 사건도 발생했다. 1949년 10월 6일에는 마산 삼진중학교 교사 도은태가 마산삼진중학교 법인설립인가 축하 기념으로 학생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검열하던 진북지서 경찰이 ‘연극 대사가 불순하다’며 학생들을 진북지서로 연행하였다. 도은태는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진북지서를 항의 방문했으나 오히려 지서에 붙잡혀 조사를 받게 되었다. 학생들과 함께 고문을 당하던 도은태는 다음 날인 1949년 10월 7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형무소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집단학살당한 민간인들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이었다. 마산형무소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5일, 7월 21~24일, 8월 24일, 9월 21일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최소 296명의 재소자들이 진해해군헌병대와 마산육군헌병대에 넘겨져 마산 구산면 앞바다(괭이바다)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마산형무소 학살은 7월 5일 18명의 일반사범 가석방과 함께 36명의 좌익재소자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징역 5년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던 장기수 36명이 진해 해군 헌병대로 인계되어 진해 앞바다 무인도에서 모두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학살은 7월 21일부터 24일까지 있었다. 마산형무소 기록인 재소자인명부의 111명, 수용자신분장의 90명의 재소자들이 이 시기에 마산 육군헌병대로 인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201명이 총살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CIC의 지휘를 받은 헌병들이 산에 일렬로 파 놓은 구덩이에서 눈을 가리고 총을 쏘는 모습을 형무관들이 목격했다.

3차 학살은 8월에 있었다. 위의 형무소관련 기록들에 따르면, 8월 24일 51명의 재소자들이 마산육군헌병대에 인계되어 총살당했다.

4차 학살이 있었던 9월 21일에는 재소자 8명이 마산육군헌병대에 넘겨져 총살당했다. 이 시기의 희생자 중에는 이미 형기가 7월 31일 만료된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전쟁 발발 당시 마산형무소 근무자 김씨(김영현)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재소자 500~6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마산형무소 『재소자인명부』에 의하면, 전쟁발발 직후 재소자는 400여 명으로, 이 중 좌익사범으로 분류된 재소자는 145명이었다. 1949년 8월 재소자 수가 741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수치는 많이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해조직과 관련하여 마산지구 헌병대원이었던 노씨(노원태)는 전임 마산지구헌병대장은 홍순봉, 박창록의 순이었고, 당시 마산지구헌병대는 헌병사령부 제1대대 소속이었다고 한다. CIC조직에 대해서마산경찰서 내서지서장 박씨(박종호)는 ‘육군 31방첩대가 마산시 추산동 양조장에, 해군 방첩대는 마산시 선착장에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진해의 주민들은 8월 12일 마산시 내서면 진동고개에서 희생되었다.

창원에서는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 주민들이 7월 15일 경 각 지서로 연행되었다가 마산형무소로 이송된 후 희생되었다.

상남면 주민들은 7월 14일과 8월 15일경 창원군 웅남면 아리송골에서 희생되었다.

웅남면 주민들은 8월 6일 상남면 남산리 성주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대산면 주민들은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사이 집에서 연행되거나 갈전리 공설운동장에 소집된 뒤 대산지서를 거쳐 김해시 진영읍 창고에 구금 중 8월 14일경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희생되었다.

유가족들은 대부분 사건발생 몇 년 후 나밭고개에서 희생자의 유품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1960년 합동묘 조성에 참석하였다.

같은 시기에 정치범 외에도 마산형무소로 연행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마산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마산형무소와 마산경찰서 유치시설에 감금되었다가 희생되었다. 마산형무소에 감금된 주민들은 7월 15일 마산시민극장에 소집되었거나 각 지서에서 바로 연행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마산형무소로 연행된 주민들은 마산형무소 마당에서 지내야 했으며 “고백서”라는 문서를 작성해 CIC군인들에게 제출했다. 그러면 군인들은 이를 근거로 주민들을 A, B, C등급으로 구분했다.

A등급에 대한 학살은 7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A등급의 주민들이 학살당하면, 다시 B등급의 주민들이 A등급이 되어 또 학살당했다. 결국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학살은 8월 23일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마산형무소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은 모두 400~5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60년 10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 대표 노현섭이 마산보도연맹 학살에 가담한 경찰관 등에 대한 고발장에 언급된 것이다.

한편 마산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트럭에 실려 마산시 창포동 해안가(현 마산항 제1부두)로 갔다가 다시 LST 2대에 실려 나가 괭이바다(구산면 앞바다)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육군 헌병대는 추산동(현 추산아파트), 해군 헌병대는 마산항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1950년 7월 15일부터 소집당해 마산형무소 등로 이송되어 7월 24일부터 8월 23일까지 살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된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의 수는 모두 717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미군폭격 피해>

 

전쟁의 전선은 1950년 8월 초순부터 9월 중순까지 마산지역에 걸쳐있었다. 마산 서측부근에서는 미 25사단이 1950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8월 31일부터 9월 14일까지 전투를 치렀다고 하는데, 이들과 인민군이 대치하는 동안 마산지역의 주민들은 미군의 소개작전과 폭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해안지역에서는 국군에 의한 집단희생사건도 나타났다.

 

마산 진북면에서는 8월 3일 미군들이 면 직원들과 함께 예곡리 마을에 진입하여 마을을 비워야 한다며 주민 소개 명령을 내렸다. 마을을 떠나던 중 뒤 쳐져 따라가던 노인 등 4명이 인곡천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예곡리의 이웃에 있는 마을인 덕곡리에 미군들이 몰고 온 피난민이 들어왔다. 피난민들은 지산리 주민들이었고 덕곡리 주민들이 이들을 위해 밥을 짓던 중 다시 소개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피난민과 마을주민들이 정신없이 개천 방향으로 이동하자 갑자기 사방의 미군들이 총과 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세 마을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거제도로 보내졌다.

 

피난민이 살해당한 사건은 부산리, 망곡리에서도 있었다. 8월 6일 이장 등 부산리 청장년 6명이 마을 골짜기에 숨어 있던 중 미군이 총을 쏴 이장 이삼재를 살해했다. 8월 9일에는 뒷산에 피난하던 망곡리 주민 30여 명이 미군의 총격을 받아 5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진북면에서 피난민을 살해한 미군은 미 5해병대 또는 미 25사단 24연대로 추정된다.

 

1950년 8월 11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에서 작전을 벌이던 미군 킨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를 피해 마을에서 떨어진 전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을 폭격, 포격하여 86명을 살해했다.

이들 주민들은 7월 말부터 시작된 전투기 폭격과 함포 사격을 피해 마을 외곽에 있던 성주이씨 재실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재실에는 곡안리 주민뿐 아니라 임곡리 등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150여 명이 피난하고 있었다.

이들이 피난생활을 하던 중인 8월 4일 미군이 진전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곡안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어 8월 7일과 8일에는 진전면 임곡리 마을이 폭격을 당했으며, 8월 10일 저녁에는 미군들이 “작전지역이므로 모두 마을을 떠나 마산으로 가라”는 지시를 했다. 주민들은 지시에 따라 재실을 떠났으나 마을 입구에서 또 다른 미군에 의해 이동을 제지당했다. 이들을 제지하던 미군들은 어두워지면 위험하다며 밤은 재실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라고 했다.

다음 날인 8월 12일 새벽 주민들이 막 피난을 떠나려고 준비하던 중 재실로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으며 이어 박격포와 함포 공격, 전투기의 폭격도 있었다. 이로 인해 86명이 사망했다.

생존한 주민들은 미군의 유도에 따라 마산으로 이동했다가 군함을 타고 마산, 진해, 부산을 거쳐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이동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8월 7일부터 개시된 킨(Kean) 특수임무작전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당시 킨 작전은 미 25사단이 진주로 진격하여 인민군 6사단을 물리치고 그 북쪽에 있는 인민군 4사단을 포위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8월 18일에는 구산면 구복리 입구인 돗섬에서 술을 마신 무장 군인 2명이 구복리 마을에 와서 배를 바다에 침몰시키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포를 쏘면서 주민들을 소집했다. 이 군인들은 마을 남자들을 참나무 몽둥이로 한참 동안 구타한 후 마을 주민 장명술 등 3명을 배에 태우고 쇠섬 근처로 나가 배에서 장명술을 총살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8. 12.

노산

30

마산경찰서

형무소

1950. 7. 5.

괭이바다 등

36

해군헌병대

보도연맹

1950. 7.14.~8.15.

아리송골 등

형무소

1950. 7.21.~8.24.

괭이바다 등

201

CIC

보도연맹

1950. 7.24.~8.23.

괭이바다 등

500

CIC

소개

1950. 8. 3.~9.

인곡천 골짜기 등

20

미군

소개

1950. 8. 12.

성주이씨 재실

86

미군

소개

1950. 8. 18.

쇠섬

1

국군

형무소

1950. 8. 24.

괭이바다 등

51

CIC

형무소

1950. 9. 21.

괭이바다 등

8

C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