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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함안지역사건 종합

2013.07.26 20:54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741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 발발 후 함안경찰서로 소집 또는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함안면 북촌리 성고개일대에서 경찰 또는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연행된 또 다른 주민들은 1950년 8월 5일경 트럭에 실려 마산 방향에서 희생되기도 했으며, 대산면에서 연행된 주민들은 8월 20일 피난 간다면서 끌려나가 대산지서 인근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함안경찰서 군북지서 근무자 김씨(김채곤)는 밀양으로 후퇴하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경찰관계자는 당시 희생자는 100여 명이었는데, 경찰이 CIC에게 인계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 칠서지서에 잡혀 있던 이주문이 함안경찰서로 이송되기 전 도망하다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발생했다.

함안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하던 시기에 피난민들이 같은 장소에서 집단학살당하기도 했다. 8월 20일 강을 건넌 피난민 20여 명이 도민증이 없다는 등을 이유로 연행되어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된 장소에서 총살되었다.

함안에 미군이 진입한 시기에도 미 지상군에 의한 주민 피해가 잇달았다. 미군의 소개지시에 따르지 않았거나 의심 가는 피난민이라는 이유로 8월 3일 군북면 덕대리, 8월 5일 칠원면 운서리, 8월 17일 군북면 사촌리, 8월 18일 함안면 괴산리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미군폭격 피해>

 

1950년 7월 30일 진주를 방어하던 미군이 함안으로 후퇴하자 8월 3일부터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 미군 폭격이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인민군은 8월 10일 또는 11일 마을에 들어왔으므로 폭격 당시 마을에 인민군은 없었다.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폐광으로 피신했는데, 피신 도중 식량을 구하러 나갔던 주민들이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다. 미군이 들어 온 후에는 폐광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이 거제 장승포로 소개되었다.

군북면 원북리 주민들은 1950년 8월 2일 박격포 등 포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자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폭격 피해를 당할 위험은 여전했고 결국 마을로 되돌아와 근처에 있던 기차터널인 ‘어시굴’로 피신했다. 이 굴은 길이 300여 미터로서 당시 수백 명의 주민들이 피신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8월 3일 주민 중 3명이 터널을 나갔다가 폭격에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마을이 폭격당하는 것에 비해 터널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8월 18일 폭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정이 바뀌게 되었다. 미군 전투기들은 마을 뿐 아니라 터널 안으로도 로켓과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다. 터널에 대한 폭격은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희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피난민 대부분이 외지인이었으므로 희생자들이 누구였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미 공군 F4U전투기들은 8월 19일에도 폭격을 계속했다. 전투기들은 소자골 골짜기 작은 오두막에서 피난하던 월촌리 주민 12가구를 폭격했다. 8월 20일에는 잘 보이면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장지리 남산벌판 인근 마을에서 10일 동안 별 일없이 피난하던 2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아침 9시부터 폭격을 당했다. 일반 폭탄은 물론 네이팜탄까지 투하되었고 이어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로 인해 134명의 사망자와 57명의 부상자 신원을 확인했으며, 전체 사망자들이 적어도 150여 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미 공군은 군북면 사촌리 마을 주택을 목표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

8월 21일에는 군북면 박곡리에서 피난을 나가던 주민들이 F4U 4대에 의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받았으며, 여기에 장자리 방면에서 날아 온 지상군의 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중 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8월 20일과 28일에는 법수면 강주리에도 미군 폭격이 있었고 사망한 주민들 중 7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8월 30일에는 군북면 영운리와 하림리에 폭격이 있었다. 4대의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마을을 불태웠다. 이날 주민 21명의 피해사실이 확인되었다.

폭격은 9월에도 이어졌다. 9월 5일 대산면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양포나루에 모여 있던 주민들이 흰 수건을 흔들었음에도 미 전투기가 기총사격을 가해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9월 9일 수곡리 폭격으로 4명이 희생되었으며, 9월 12일에는 군북면 사촌리에 두 번째 폭격으로 인해 8명이 희생되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폭격

1950. 8. 2.~3.

군북면 원북리 등

미군 등

소개

1950. 8. 3.~20.

덕대리 등

미군 등

보도연맹

1950. 8. 5.~20.

성고개 등

100

CIC 등

폭격

1950. 8. 18.

어시굴

수백

미군

폭격

1950. 8. 19.

소자골 골짜기

미군

폭격

1950. 8. 20.

장지리 남산벌판 등

150

미군

폭격

1950. 8. 20.~28.

법수면 강주리

7

미군

폭격

1950. 8. 21.

군북면 박곡리

5

미군

폭격

1950. 8. 30.

군북면 영운리 등

21

미군

폭격

1950. 9. 5.~12.

양포나루 등

18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