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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천지역사건 종합

2013.07.26 17:4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371

<국민보도연맹사건>

 

사천에서는 1950년 7월 말 노산공원과 고성군 질매섬, 서포면 비투섬, 용현면 석계리 등에서 후퇴하는 경찰에 의해 주민들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주민들이 희생된 구체적인 시기나 규모는 조사되지 않았다. 남양면의 경우는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없었는데, 당시 특공대원 김씨(김영찬)의 증언을 통해 국민보도연맹사건의 전개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전 남양면 보도연맹원은 81명이었다. 삼천포지역에서는 전쟁 발발 직후 삼천포경찰서에 근무하던 일선 담당 경찰이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어 있는 남양초소를 점검 하던 중 실수로 총을 쏘게 되었는데, 이를 인민군의 습격으로 오인하여 지서주임 이실구와 순경 3명이 도주했다. 이 상태에서 청년단장이 주민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복귀한 지서주임이 이일로 인해 청년단장 김용선과 다투었다. 결국 남양면 유지들의 중재로 화해하게 되어 남양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모두 죽음을 면했다.

한편, 주민 정씨(정소광)는 사남면에서는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사살하고 삼천포함에서 배를 타고 후퇴했다고 증언했다. 이로 보아 사천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 사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군폭격 피해>

 

국민보도연맹사건 외에 사천지역의 주민들이 받은 가장 큰 피해는 미군 전투기의 폭격에 의한 것이었다. 미군의 사천지역 폭격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 후 인민군과의 전선이 형성되던 7월 29일부터 8월 22일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인민군이 사천 진입을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어 인민군과 민간인의 구별 없이 폭격이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29일 오후 2시 미 전투기 2대가 곤양면 서정리 곤양삼거리와 빨래터를 폭격하여 가옥이 불에 타고 피난 나온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같은 날 곤명면 마곡리와 조장리 등에서도 폭격이 있었다. 이렇게 미 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기 시작하자 주민들 대부분은 피난을 떠났으며, 수백 명의 주민들이 10km에 걸친 경호강 강변에서 흩어져 피난하고 있었다. 이들은 폭격이 없는 밤에는 집에서 지내고 아침이 되면 가재도구를 싸들고 강변으로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8월 1일 강변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정동면 풍정리 솔밭에서 피난하던 주민들이 전투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8월 2일에는 아침 8시 정찰기가 지나고 난 뒤 마곡리 부근에서부터 폭격이 시작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오에는 서포면 외구리 오리방천이 폭격을 당해 80여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오후 2시에는 조장리 강변의 피난민들이 폭격을 당했다. 이때에도 폭격 전에 정찰이 있었다.

8월 4일부터 6일 사이에는 미 전투기 3대가 곤명면 본촌리, 용현면 통양리와 송지리, 향촌마을에 기총사격을 가해 주민과 피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8월 22일에는 아침 8시 전투기의 폭격으로 사남면 화전리 주민들이 사망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말

노산공원 등

사남지서 등

폭격

1950. 7. 29.

곤양면 서정리 등

미군

폭격

1950. 8. 1.

정동면 풍정리

미군

폭격

1950. 8. 2.

곤명면 마곡리 등

100

미군

폭격

1950. 8. 4.~6.

곤명면 본촌리 등

미군

폭격

1950. 8. 22.

사남면 화전리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