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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남해지역사건 종합

2013.07.26 17:29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182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남해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남해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경찰서에 의해 세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이중 A급으로 분류된 주민 150여 명이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중 일부는 인맥과 돈 등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으나 남은 주민들은 이동면 등에서 희생되었다. 33명은 인민군 점령 직전인 7월 27일 트럭에 실려 남해군 이동면 복곡 저수지 근처 야산으로 연행된 뒤 사살되었으며, 다른 30여 명은 이튿날 강진만에서 학살당했다. 강진만의 희생자들은 사천포를 오가는 순항선에 구금되어 있다가 밤중에 한명씩 불려나가 총살당했는데, 이들의 시신이 인근 설천면 해안가로 밀려들었고 심지어 대마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 남해지역에서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남해에서는 1950년 9월 26일 고현면 선소리에 진해방어대로 추정되는 해군이 상륙했다. 이들은 인민군 측에 부역을 했다며 이어리 주민 최원오 등 3명을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여수시 돌산도 죽포리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국군의 작전기록에서 확인되는데, 해군의 1950년 9월 26일 『작전경과보고서』에는 ‘해본작명 갑제170호로 남해군과 여수시를 확보하기 위하여 통제부 육전대 1개 대대를 남해군에 상륙시켜 동 지구를 소탕한 후 여수시를 확보케 함’, ‘적 사살 4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해군사』(작전편)에는 당시 진해방어대 1개 대대(송인명 중령 지휘)가 1950년 9월 26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선소리에 상륙하였으나 적의 주력은 이미 하동과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고 소수의 잔적만 남아있어 남해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고 350명의 민간인 협력자를 자수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27.~28.

복곡저수지 야산 등

60

남해경찰서

부역

1950. 9. 26.

여수 돌산도

4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