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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거제지역사건 종합

2013.07.26 17:20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321

<전쟁 전 정치적 피해>

 

거제에서는 1947년 8월 19일 300여 명의 주민들이 연초면 다공리 보리공출 항의 집회에 참가했는데, 이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했다.

 

거제지역에서는 1949년 4월 국군 2사단 16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거제로 출동하여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으며, 일부 청년들이 재판을 받았고 상당수의 청년들이 살해당했다. 하청지서 유치시설에 갇혀 있던 구복서 박동조 원정국 이만기 등 주민들이 1949년 5월 26일 전후하여 하청중학교에 주둔하던 토벌군인들에 의해 중학교 앞산과 옥산리 야산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거제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윤학도 등 11명의 주민들이 1949년 4월 22일 장승포 신사터에서 국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당시 총살은 공개적으로 저질러졌으므로 윤학도 등 희생자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은 주민들이 모두 목격하였다. 총살 장소에는 이미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으며 그 위에 기둥을 세워놓고 희생자들을 묶어 세웠다. 희생자들이 총살을 당한 후 뒤에서 기둥에 묶은 줄을 끊으면 희생자들은 앞의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같은 시기 동부지서에 갇혀 있던 동부면 주민들은 구천리 서당골에서, 일운면 주민들이 마을 해변에서 집단희생당했다.

 

토벌국군이 거제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거제경찰서 역시 민간인들에 대한 연행과 고문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으로 이종정 사건을 들 수 있다.

거제에서는 1949년 5월 1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거제지부 부지부장이었던 이종정이 거제경찰서로 연행되어 5월 2일 고문사당했다. 이종정이 연행된 이유는 민간인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경찰을 불신하고 군대를 불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종정의 국회의원 출마를 우려한 반대세력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발견 당시 시신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회총재의 자격으로 애도의 글을 보냈는데, 여기에 “군(君)은 일찍부터 우리 국토와 우리 민족을 구하는 길은 오직 진정한 국민운동에 의존하여야 된다는 결심으로 용약(勇躍) 국민회 거제지부를 결성하여 많은 성과를 내어가는 도중 불행하게도 옥중고혼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념할 바 아니리오.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으니 군(君)의 사(死)도 천명이라 하여야 옳을는지. 아 원통하도다. 군의 죽음이여. 나는 군의 비보를 듣고 여러 각도로 생각한 나머지 결국 군의 사인도 운명에 붙여 자위하고자 하노라. …(후략)”라고 적혀 있다. 당시 거제에는 토벌국군이 주둔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던 시기였고, 결국 장승포경찰서 측에서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민간인들의 피해는 계속되었다.

거제에서는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던 시기인 7월 27일 72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을 지심도 앞바다에서 살해하는 등 9월 초까지 주민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희생자 유족들의 진정에 의해 헌병대에서 조사하여 군검찰에 기소되었으므로 「강화봉 등에 대한 군법회의 판결심사자료」가 존재한다. 이 문서에는 경남지역 등 인민군 미점령지역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위가 자세히 파악되는데, 이는 다른 지역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CIC통영파견대(대장 강경일)은 7월 14일(또는 15일) 거제경찰서, CIC문관 등에게 거제의 갑종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을 즉시 구속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것과 거제 국민보도연맹원 260명(이로보아 당시 거제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의 수를 알 수 있다) 중 을종 악질에 해당하는 자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거제경찰서는 다음 날인 7월 15일(또는 16일) 각 지서 소속의 경찰관에게 통보하여 갑종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을 소집하여 구속하였으며, 7월 19일 사찰주임 강화봉이 중심이 되어 을종 국민보도연맹원 29명의 명단을 뽑아 CIC통영 파견대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CIC통영 파견대장 강경일은 7월 21일 국민보도연맹원 29명을 구속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거제경찰서 등은 이 명령에 따라 29명의 을종 국민보도연맹원을 모두 구속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거제경찰서는 7월 24일에 소집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심사했다. 당시 경찰서는 평소 1개당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유치장 3개와 경찰서 내 물품보관 창고, 장승포국민학교를 유치시설로 사용하였다.

 

CIC 유기봉은 육군본부 정보국 CIC 경남지구본부 통영파견대 대장으로부터 7월 25일 오후 9시경 살해명령을 받았다. 보도연맹원 72명에 대한 즉결 처분의 명령을 내려지자 거제경찰서 사찰주임 강화봉 등은 7월 26일 오후 7시 총살에 동원될 사찰계 형사들과 거제CIC분견대(대장 유기봉), 해군정보대(G-2) 부대장 박진홍, 해군정보대(대장 천재홍), 거제도 HID 윤상오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보도연맹원을 즉결처단할 것이니 각자 특히 기밀을 유지하라. 만일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처단한다”라고 훈시 한 후 경찰관들로 하여금 거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국민보도연맹원 72명과 청년방위대 영창에 갇혀 있던 박삼수를 경비선에 태우게 하였다. 7월 27일 새벽 1시경 일운면 지심도 앞바다 구주레끛(구조라의 사투리) 해상에서 학살했다.

 

<좌익혐의 피해>

 

이어 8월 19일에는 CIC문관 현춘수 외 7명이 CIC 통영파견대 육군대위 강경일의 명령에 의하여 이른바 ‘거제경찰서 습격 음모사건’의 피의자 8명과 함께 동부면 가배리 김영수, 김관수 형제를 지심도 동방 10리 지점 해상에서 살해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거제경찰서 소속 경찰관 한씨(한동석)는 헌병대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새벽 2시경 형사 소집이 있어 서에 가니, 사찰주임 강화봉, CIC대장 황창록, CIC부관 현춘수, CIC 최상사 등이 동석하여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찰주임 강화봉이 소집 형사 중 형사대장 이종식, 형사 박홍태, 동 김계용, (거제경찰서) 전위대 윤병만, 저까지 계 5명을 지명하여, CIC 현부관의 인솔하에 폭동음모사건 피의자를 처단할 것이니 출동하라고 명령하기에 저와 박홍태는 유치장에서 출감한 폭동음모사건자 5명을 연행 경비선에 상선하고 경비하니 CIC 현부관 …(중략)… 등이 김영수, 김관수 외 3명과 같이 양손을 뒤로 묶어 줄줄이 달아 와서 상선하여 가지고 전술한 해상에서 CIC 현부관 지휘 등에 폭동음모자를 돌을 달아 해(海)중에 집어넣은 다음, 김영수 김관수 외 3명을 CIC 현부관과 최상사가 돌을 달고 현, 최, 윤병진, 이종식, 박홍태 5명이 각 5명씩 물에 밀어 넣었습니다. 김용수, 김관수는 통영군 일운면 미조라리 전방 지심도 동방 해상에서 살해하였습니다.”

 

이 외에, 거제 성포지서에 잡혀간 사등면 청곡리 박임주 등 주민들도 8월 26일 사등면 가조도 해안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가조도 해안으로 밀려온 시신들은 10여 명씩 묶여 있었다고 한다. 수습 당시 시신의 몸에 총상은 없었으나 손톱이 다 빠져 있었다. CIC가 8월 13일경 성포지서에 감금했던 김대봉 등 주민들을 엮어서 끌고 가는 것이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9월 19일에도 정남진 등 주민들 40여 명이 거제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수장당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7. 8. 19.

연초면 다공리

3

경찰

전쟁 전

1949. 4.~5.

장승포신사터 등

16연대

보도연맹

1950. 7. 27.

지심도 앞바다

72

CIC 등

보도연맹

1950. 8. 19.

10

CIC 등

보도연맹

1950. 8. 26.

가조도 해안

성포지서

보도연맹

1950. 9. 19.

40

거제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