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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993년 12월 28일 SBS뉴스

2016.12.10 13:4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134


금정굴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영상자료입니다.

학살 장면을 직접 목격한 주민들, 태극단원, 치안대원들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보도와 관련하여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극단원으로 소개된 김인성 노인은 1983년 간행된 <태극단 투쟁사>의 태극단원 명부에는 없습니다. 탈퇴하셨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비밀 청년학생 조직이고 점조직형태여서 서로 누가 진짜 단원인지 알 수 없었고 가짜가 행세한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태극단이라도 가입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치안활동을 민간치안대와 태극단이 했다는 위 보도는 이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병대에 편입되었던 고양경찰서 경찰관이 수복과 동시에 치안활동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석호진 경위였습니다.


태극단원 이준영 노인의 증언(2006년 10월 18일)에 따르면 1950년 9월 28일 태극단원 일부가 덕이리 은장마을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국방부 자료 등에 따르면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들은 13명입니다. 이날은 고양군 전체가 수복되는 날이기도 하는데 학살하는 인민군 측 무장세력과 수복하는 미군 측, 또는 국군 해병대 등 무장세력의 충돌은 없었다는 의문이 남습니다. 학살자가 인민군이었다는 증언은 아직까지 없고, 함께 끌려갔던 앞 이 노인은 내무서에서 일했던 친구가 풀어줘 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1993년 당시 고양경찰서 보안계장이 이미 금정굴학살이 있었음을 조사하여 알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때가 2007년이었으니 무려 15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해방전후는 물론 전쟁 당시에도 고양지역에 극심한 좌우대립은 없었습니다. 이승만정부 고양경찰서의 체계적 학살 지휘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vNETkje9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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