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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평택지역사건 종합

2013.07.22 21:0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184

<국민보도연맹사건>

 

평택에서는 미군정시기 경찰서 수사주임(최무식)이 노동당 거물이었을 정도로 좌익세력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6월 27일과 28일 경찰이 국민보도연맹원 정태관을 비롯한 팽성면 노와리 주민 4명을 연행했고, 이들은 1950년 7월 초 팽성면 안정리 부용산에서 50여 명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전쟁이 발발하자 미 24사단이 7월 5일부터 11일까지 평택과 조치원에 주둔했다. 스미스부대가 죽미령에서 전투하던 때인 7월 5일 평택부근에서는 미 34연대와 국군 17연대가 교전했으며, 다음날인 7월 6일 미 34연대는 천안으로 후퇴했다.

인민군 후퇴시기인 9월 말 평택 주민 27명이 안성읍 비봉산 봉덕사 옆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미군이 진입하여 생존자를 병원으로 운반했다.

 

<부역혐의 피해>

 

평택경찰서는 1950년 10월 5일 공식 복귀하여 평택읍내 병원과 양곡창고 건물을 이용했다. 이들은 치안대를 지휘하여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하여 양곡창고에 가두었다. 체포된 주민들은 계엄 군인들에 의해 분류되었고, 일부는 송치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대다수는 현지에서 곧바로 총살당했다.

평택지역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곳은 청북면이다. 청북면에서는 인민위원장 박상희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삼계리 염전창고와 청북지서 유치장에 6일 내지 15일 동안 갇혀 있었다. 이들은 청북지서와 마을 창고를 오가면서 고문을 당했다. 감금된 주민들이 매를 많이 맞았으며 밥도 하루에 한 공기 밖에 먹지 못했다. 1950년 10월 16일 박상희, 최영화 등 20여명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밧줄에 묶여 현곡리 청북지서 뒷산으로 끌려가 산 너머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008.jpg 

(청북지서 뒷산 골짜기. 지서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다. 2008년 6월 3일 조사)

 

<미군 폭격 피해>

 

전쟁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3일 미 공군(한국전쟁사는 호주 공군 소속의 비행기라고 주장)의 평택역 부근 폭격으로 피난민들이 희생당했다. 『한국전쟁사 1』에 의하면 당시 평택역에서 하차를 기다리던 탄약과 폭탄도 함께 폭발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해 국군 17연대장 백인엽이 부상당한 것을 비롯하여 200여 명의 같은 연대 국군도 함께 사상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때 희생된 피난민으로 영등포에 살던 임재순을 확인했다.

 

이상 평택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는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초

안정리 부용산

50

경찰

폭격

1950. 7. 3.

평택역

미군

인공

1950. 9.말

봉덕사 옆 골짜기

부역

1950. 10. 16.

청북면

20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