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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천지역사건 종합

2013.06.13 09:48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764

 

<전쟁 전 정치적 집단학살>

 

인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피해를 입었다. 1945년 9월 9일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을 환영하던 500명의 시민들에게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미군을 환영 나온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 이석구 등 10여 명이 희생되었다.(5명사망 8명부상-로버트 올리버) 『인천시사(중)』에 의하면, 위 권평근은 인천건국준비위원회의 간부였다고 하며, 그의 죽음은 인천인민위원회가(1945년 10월 16일) 발족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예비학살 사건(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옹진지구의 독립연대 17연대가 작전계획에 따라 해상을 통해 인천으로 후퇴하여 28일 대전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6일 후퇴하던 국군 제1사단을 추격하던 인민군들이 강화를 통해 김포군 통진읍으로 진입했으며 일부는 한강을 도하하여 27일 김포지역 개화산을 점령하였다. 이들을 막기 위해 육군본부는 26일 김포지구전투사령부(대장 계인주 대령)를 만들었다. 당시 개화산을 점령한 인민군은 규모가 크지 않아 1개 연대가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1950년 6월 30일 후퇴했던 국군과 경찰이 일시 복귀하면서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8일 새벽 3시 인천에 있던 경기도 비상경비사령부가 수원으로 철수하면서 인천경찰서를 비롯하여 형무소 근무자들도 피난길에 올랐다. 같은 시간 인천지역의 경찰은 철수명령을 받고 LST 801함에 군인가족, 군속들과 함께 아침 9시에 인천항을 떠났다. 형무관들이 사라지고 경비가 허술해지자 6월 29일부터 재소자들이 옥에서 풀려나오게 되었다. 이들이 인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인천시청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이 소식이 수원에 있던 육군본부에 전달되었고 육군본부는 시흥사령부의 7사단 수용소에 집결한 5사단 20연대장에게 1개 중대의 병력을 인천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6월 29일 시흥을 출발한 국군 5사단 15연대 3대대 12중대가 6월 30일 새벽 3시 인천에 진입하여 다시 후퇴하던 7월 3일까지 경찰과 함께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다며 주민과 재소자를 연행하거나 살해했다. 같은 시기 동인천경찰서도 복귀하여 군과 함께 학살에 가담했으며, 이때 희생된 주민들의 수가 700명에서 1천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7월 3일 인민군 전차가 인천에 진입함에 따라 국군은 평택으로 철수했다. 같은 시기 인천소년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중 실종되었다며 진실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된 사건은 9건이었는데, 모두 진실규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았다.(1949년 8월 인천소년형무소의 재소자 수는 1,638명으로 나타나는데, 전쟁 발발 당시 1,3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소개작전 학살>

 

인천지역의 섬지역에서는 인공시기에도 국군의 소개작전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 1950년 8월 18일과 8월 20일 각각 덕적도와 영흥도에 상륙한 해군 육전대가 주민들을 덕적면사무소, 덕적초등학교, 영흥면사무소, 내리초등학교 등에 감금하였다가 덕적도 인근 해안가인 먹염과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서 살해했다. 당시 희생자 수는 100~150명에 달했는데 영흥도의 희생자들 중에는 인민군 점령기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었던 이승엽의 일가족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1950년 8월 18일 함포사격을 피해 야산 나무더미나 모래구덩이 등에 숨어 있었는데, 상륙한 해군 육전대가 인기척이 날 경우 확인도 하지 않고 총을 쐈다. 굴든에 의하면, 영흥도에 잠입한 부대의 책임자는 클라크(Clark) 미 해군 중위였는데, 당시 클라크의 임무는 간만 상황, 해안의 진흙상태, 안벽, 월미도 수비상태 등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육군대위 1명, 병사 3명, 한국통역관 2명으로 편성되었는데, 여기에 가담한 한국통역관 2명이 계인주 대령과 연정 중령으로 보인다. 이 때 최규봉은 등장하지 않는다. 클라크는 9월 11일 팔미도 등대를 직접 답사했다.

 

<인민군측에 의한 피해>

 

인공시기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발생했다. 상륙작전이 진행되던 9월 15일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우익인사 50여 명이 후퇴하던 내무서원에게 사살당했다. 학살자들이 이후 어떻게 피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는 전쟁발발 직후 인천경찰서가 보여준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미군폭격피해>

 

인민군은 월미도를 점령하자 서쪽에 요새를 구축했으며 주민들은 섬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인민군 요새가 있던 서쪽지역에 폭격이 있었지만 동쪽지역에는 폭격이 없었다.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 소속의 전투기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월미도 지역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민간인 주거지역임을 알았음에도 동쪽에 3차례의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사망했는데, 이 중에는 폭격을 피하기 어려웠던 여성과 어린이가 많았다. 기둥 하나 남김없이 가옥은 모두 전소되었다. 한편, 이 폭격으로 인해 인민군들이 피해를 입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태풍 때문에 다음 날인 11일에는 폭격이 없었으나 12일과 13일 비슷한 유형의 폭격이 계속되었다. 13일부터 인민군 요새에 대한 함포사격으로 동쪽 요새에 있던 인민군 400명 중 100명이 사망했다.

 

 월미도1.jpg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월미도. NARA)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이 이루어지던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사단 1개과 미 해병대에 배속된 국군 해병대 2개(또는 3개) 연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먼저 월미도를 공격하여 수비하던 인민군 400여 명 중 108명 사살, 136명 포로, 100여 명은 동굴에서 사망했다. 당시 인천을 방위하던 인민군은 2,000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미해병대에 배속되어 9월 16일 상륙한 한국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 섬멸임무를 맡았다.(한국전쟁사 3, 703쪽 717쪽) 상륙한 국군 해병대 1대대는 전투가 거의 없이 본부를 서림(瑞林)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반면, 국군 해병 3대대는 잔적 300명을 사살하고 181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 제2대대는 사령부를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두었다. 한국해병대는 숨어 있는 패잔병과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많은 피난민을 조사했다고 한다.

 

인천상륙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부역자 색출과 즉결처형이 저질러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국군 해병대 3대대 11중대 상사 강씨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은 시가지에 돌입해서 경동지구 즈음에 어여쁜 여자가 반가움에 넘쳐서 대한민국만세를 부른다는 것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러서 눈물을 머금고 사살시킨 일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는 수복 당시 만세 한 번 잘못 외친 것이 총살당해야 할 이유였다는 사실과 총살에 가담한 병사 역시 이에 대해 ‘눈물을 머금은 것’ 외에 범죄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수복이 이루어지고 치안이 안정된 후 인천경찰서 유치시설에는 권투선수 심태영 등 700~800명이 주민들이 잡혀 있었다. 주민들은 1950년 10월경 경찰, 군 CIC, 헌병에 의해 합동으로 민간선박에 태워져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경인합수부에 의해 부역혐의자를 분류된 주민들은 특무대가 주도 아래 소월미도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같은 시기 동인천경찰서 유치시설에 갇혀 있던 400~500명의 주민들이 수인역 뒤 해안가에서 살해되었다. 동인천경찰서에는 1·4후퇴 직전에도 주민들이 학살당했는데, 당시 경찰은 유치장에 주민들을 가두어 둔 채 불을 질러 살해했다.

 

인천에서는 각 경찰서 외에도 산하 각 지서에서도 희생사건이 있었는데, 10월 15일 영흥면 이승철 등 8명의 주민들이 인천경찰서 대부지서로 이송된 후 대부면 남리 새방죽에서 집단살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서곶면에서는 12월 10일경 검암리 인민위원회장이었다는 이유로 서곶지서로 출두한 박단용이 인천시 심곡동 신아고개 인근 숲에서 총살당했으며, 소래면에서는 남촌리 인민위원회 정준진, 영종면 운서리 인민위원회 정무성은 소래지서에서 고문으로 살해되었다. 한편, 10월 중순에는 인천, 강화, 김포 등에서 연행된 200여 명의 주민들이 마산형무소로 이송되는 배 위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생존자 한씨(한현우)의 증언에 의하면, 마산에 도착했을 때 15명만 정도만 살아 있었다.

 

<1‧4후퇴시기 예비학살>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1‧4후퇴시기에도 다시 희생되었다. 인천소년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김지현 등 주민들은 1950년 12월 말 후퇴하는 경찰에 의해 바닷가에서 집단 살해당했으며, 같은 시기에 대야리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지현(박정근은 고문으로 살해당했다)이 신천리 양조장에 감금되었다가 인천경찰서를 거쳐 인천소년형무로 이송되었다가 1950년 12월 말 후퇴하는 경찰에 의해 바닷가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경기도 경찰국(인천 창영초등학교)에 감금되었던 주민 중 48명은 1951년 1월 4일 학교 근처에서 총살당했으며, 같은 날 동인천경찰서 임시유치시설이었던 창영동 야전장유공장 2개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 300여 명이 불태워 살해당했다. 인천경찰서 유치장에서는 35명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사망자명부』에는 10월 5일부터 12월 31일까지 157명의 명단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재수복 후 부역혐의피해>

 

인천에서는 재수복 시기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51년 2월 12일 국군 1사단 12연대 1대대 소속 육군 중위 한00이 신기봉 일가족 17명과 박장원 일가 5명을 집단 살해했다. 한00은 이 사건으로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상 인천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미군

1945. 9. 9.

10

미군

보도연맹

1950. 6. 30.

인천시내 일대

1,000

5사단, 경찰

후퇴 후 재진입

소개작전

1950. 8. 18.~20.

덕적도, 영흥도

150

해군 육전대

상륙작전 전

인공

1950. 9. 15.

인천내무서 유치장

50

인천내무서

미군

1950. 9. 15.

월미도

100

미군

상륙작전

부역

1950. 10.

팔미도 해상

800

인천경찰서

권투선수 심태영

부역

1950. 10.

수인역 뒤 해안가

500

동인천경찰서

부역

1950. 10. 15.

대부면 남리 새방죽

8

대부지서

영흥면 이승철

부역

1950. 10. 중순

인천 마산 해상

200

강화 김포 주민

1‧4후퇴

1951. 1. 4.

경기도 경찰국 등

350

경기도 경찰

사망자명부

1951. 2. 12.

22

1사단

신기붕일가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