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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여주지역사건 종합

2013.07.22 20:48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5077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전쟁 발발 전 여주경찰서는 여주의 청년들이 1947년 3월 15일 능서지서와 면사무소 습격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62명을 연행했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경찰지서습격 미연방지 여주 모 청년단의 비밀계획발각, 제1관구경찰청 서 경무부에 보고. 제1관구경찰청으로부터 경무부에 보고된 것을 보면 경기도 여주에서 모종의 비밀계획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한다. 즉 여주경찰서관내 능서면 모 청년단체원들이 친위대 혹은 돌격대를 조직하여 여주경찰서 관내 능서면 지서와 능서면 사무소를 습격할 목적으로 작살 창 곤봉 등을 준비하고 모스크바 4상회의관계의 호기를 이용하여 15일 암야를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할 것을 은밀히 계획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여주서에서는 서장이하 총동원으로 12일 미명용의자 62명을 검거하여 목하 엄중 취조중이라 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 여주지역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각 면의 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어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시설인 어름창고에 갇혔다. 이들은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심사된 후, 1950년 7월 1일경 후퇴하던 경찰과 국군 6사단 헌병대에 의해 여주읍 교리 건지미 골짜기(현 낙원주택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수십 명이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두 명이 생존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6사단 헌병대 상사였던 김씨는 헌병대가 여주와 이천에 주둔하고 있던 1950년 7월 1일 보도연맹을 처분하라는 명령을 공식적으로 받아 집행한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 점령 당시 상황에 대해선 아직 정리된 바 없다.

여주지역의 수복은 낙동강전선에서 북상하던 국군 6사단에 의해서 1950년 9월 23일경(?) 이루어졌다. 6사단은 수복하면서 후포리 인민위원장 신재동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이때 유엔군에 배속되었던 여주경찰서 소속 경찰관 일부가 선발대로 복귀하였는데, 당시 여주경찰서가 소실되어 여주국민학교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복귀한 여주경찰서는 사찰계를 중심으로 부역자명단을 작성하였으며, 이들의 색출과 연행은 대한청년단 출신 치안대의 협력을 받아 이루어졌다. 당시 여주경찰서는 여주국민학교 강당과 얼음 창고를 임시 유치시설로 쓰고 있었으며, 연행된 주민들이 많아지자 여주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당시 20~30명 정도 되는 주민들이 죄수들처럼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둘레에 10여 명의 치안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주민들이 갇혀 있는 동안 여주경찰서 사찰계는 이들을 심사하고 A, B, C 3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여주경찰서는 1950년 10월 11일경부터 학살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10월 11일 여주읍 교리 여주향교 부근에서 총성이 났다. 총성을 들은 연행자의 가족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여주향교 뒷산 방공호에서 20여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희생자들은 머리에 한 발, 가슴에 두 발의 총을 맞았다. 이 외에도 여주읍내에서는 영릉 입구 왕대리 여주보건소 주변 약수터와 여주읍 하리 양섬(고려병원 뒤) 모래사장에서도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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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왕대리 현장. 국방부 전사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1년 5월 민간인희생자 유골을 발굴했다. 유골은 2014년 2월 무연고처리될 뻔 했다. 2014년 3월 31일 조사.)

 

가남면에는 수복하던 국군 6사단이 잠시 주둔했다. 국군이 떠난 직후 가남면에 복귀한 가남지서장의 지휘 아래 치안대가 조직되어 부역자에 대한 색출과 연행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치안대원들에 의해₼가남지서로 연행되어 소방서 창고에₼임시 감금되었다. 1950년 10월 소방서 창고에₼갇혀 있던 100여명의 주민들은 경찰의 지휘 아래 치안대에 의해 태평리 공동묘지와 가남지서 뒷산(현 태평터미널 뒤, 태평근린공원 입구) 폭탄 구덩이와 박산고개에서 총살당했다. 가남지서 뒷산에서는 20여명의 부녀자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산은 먼 곳에서도 볼 수 있었으므로 많은 주민들이 이 장면을 목격하였다.

 

대신면에서는 주민들이 치안대에 의해 끌려가 대신면사무소 옆에 있는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남녀 구분 없이 갇혀 있었는데, 어린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총살은 9월 30일부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보통리 강변 송장웅뎅이와 장풍리 골짜기였다. 치안대원으로 동원되었던 김씨는 희생자들을 여주경찰서로 넘긴다면서 끌고 나가 총살한 것이었으며 하루에 22명까지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장풍리 이장이었던 이씨는 장풍리 골짜기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200여 명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012.jpg

(대신면 장풍리 골짜기. 유족 정병두는 이곳에서 수백명이 희생되었으나 유해를 수습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주둔하던 군부대조차 귀신이 무서워 이전했다고 증언한 곳이다. 2007년 12월 5일 조사.) 

 

북내면에서는 당우리와 운촌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치안대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북내지서의 지휘 아래 각 마을 주민들은 지서 앞 창고로 연행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지서의 조사를 받으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10월 29일경 북내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 중 대부분이 여주읍으로 가는 길목인 북내면 신남리 버시고개와 신남리 새재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10여 명씩 묶여 버시고개를 넘어가던 중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골짜기 한 구덩이에는 총살당한 희생자의 시신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당시 치안대로 활동하던 차씨는 학살당한 시신들이 매장되지 않고 청솔가지로 덮어 놓은 모습을 목격했다. 학살당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는 인근 신남리 주민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신남리 버시고개 외에 새재 골짜기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여주의 유명한 좌익이었다는 오해수의 일가족 5명의 시신이 이곳에서 수습되었다. 이 외에 여주군 북내면 당우리 대왕사 터에서도 13명 정도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금사면에서는 부역혐의를 받아 치안대에게 연행된 금사면 주민들이 면사무소 옆에 있던 이포지서 임시 유치시설과 지서장 사택 지하에 감금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10월 10일 있었던 국군 수복 환영 대회에 나왔다가 그 자리에서 연행당했다. 당시 치안대원이었던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각 마을에서 한두 명씩은 다 잡혀왔으며 특히 인민위원회 간부가 있었던 외평리에서 가장 많이 잡혀왔는데, “빨갱이 마을에 살았으니 분홍색 물이라도 들지 않았겠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저질러진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희생사건은 10월 14일의 것이며 이날 이후 이포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은 옹기정 뒷산 공동묘지와 금사면에서 여주경찰서로 가는 길목인 흥천면 계신리 강변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홍천면에서는 흥천지서를 중심으로 면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인민위원회 등에서 부역하던 주민들을 연행해 고문을 하였으며 부역자라고 판단한 주민들을 흥천지서 부근 앞산과 복대리 쇠고개 공동묘지(현 흥천공원묘지)에서 총살했다. 일부 주민들은 가까운 이천경찰서로 연행되어 희생되기도 했다.

 

점동면에서는 현수리 보도연맹원이었던 박정봉이 수복 직후 국군 선발대에 의해 당진리 봉골산에서 살해당했다. 박정봉을 끌고 가던 군인들이 “너는 죽었다. 너는 이제 죽었다.”라며 수류탄으로 박정봉의 머리를 때렸다. 박정봉이 총살된 후 그의 형 박정만과 그의 모친 신삼순이 인민위원장과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점동면 치안대에게 끌려가 당진리 가시랏골에서 총살당했다.

 

<1‧4후퇴 시기 피해>

 

여주에서는 1‧4후퇴 시기에도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1950년 12월까지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시설인 얼음 창고로 연행되어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4후퇴 직전 하리 양섬 강변에서 총살당했다.

 

여주경찰서 매류출장소는 1951년 1월 초순 새벽에 치안대를 동원하여 임시 유치장으로 쓰였던 출장소 옆 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 수십 명을 끌고 나가 고령토 구덩이에서 총살한 후 그 자리에 암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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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류리 고령토 구덩이. 고령토를 쓰기 위해 이미 발굴했으므로 지금은 유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2009년 2월 25일 조사.)

 

부역혐의로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사건은 1‧4후퇴 후 다시 수복한 다음에도 발생했다. 능서면 마래리 변씨(변사복) 등은 1․4후퇴에서 재수복한 뒤 치안대를 조직하고 각 치안대장, 감찰, 치안과장이 되었다. 치안대는 1951년 2월 18일 오후 3시 좌익분자라며 용은리에 피난하던 양평군 지제면 지제리 조문환 등 일가족 6명을 당시 CIC대원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연행해 감금하였다. 당시 CIC는 같은 마을인 용은리에 있었다. 조문환은 이곳에서 구타를 당했으며, 같은 날 오후 4시 조문환 일가족은 박상래 등 치안대에게 끌려와 능서면 매류리 치안대 사무실로 옮겨졌다. 그 뒤 변씨 등은 회의를 열어 조문환 등 일가족을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조문환 일가족을 매류리 공동묘지 부근으로 끌고 갔으며, 희생자들을 일렬로 세운 후 7미터 떨어진 뒤쪽에서 총을 쏴 살해했다. 다음날인 2월 19일 변씨는 주민에게 지시하여 희생자들의 시신을 같은 장소 다섯 곳에 나누어 매장하였다. 치안대원들은 연행과 총살⃀과정에서 조문환이 가지고 있던 현금 3만원과 80만원 상당의 의류를 강탈하였다. 대법원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한 명 뿐 아니라 조문환 일가족을 일시에 살해한 피고인 등의 범행은 잔학무도를 극한 무참한 범행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선고 받은 형량은 고작 2년에 그쳤다.

 

이상 여주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7. 3. 12.

능서면

62

경찰

2‧7투쟁 관련

보도연맹

1950. 7. 1.

교리 건지미골짜기

수십

6사단

부역

1950. 10. 11.

여주향교 방공호 등

수십

경찰

부역

1950. 10.

가남 태평리 묘지 등

100

경찰

부역

1950. 10.

대신 장풍리골짜기 등

200

경찰

부역

1950. 10.

북내 버시고개 등

100

경찰

부역

1950. 10.

금사 홍천 점동 등

200

경찰

1‧4후퇴

1951. 1.

하리 양섬, 매류리 고령토

수십

경찰

1‧4후퇴

1951. 2. 18.

매류리

6

치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