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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양평지역사건 종합

2013.07.22 20:3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567

전쟁이 발발하자 양평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대개 정상 출근했다. 경찰관들은 통신이 전부 끊어진 상태여서 비행기 L19가 떨어뜨린 통신문을 보고 후퇴했다. 당시 통신문에는 ‘경찰들은 내무부로 가서 지시를 받으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양평경찰서는 자신들은 피난하면서도 면사무소 공무원들에게는 면민 동요를 막기 위해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이 때문에 국군 수복 후 부역자 소리를 듣게 된 공무원이 많았다. 양평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는 조사보고는 아직 없다.

 

인민군이 양평지역을 점령하자 우익 청년들 대부분은 멀리 피난하지 못하고 인근 산악지역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양평경찰서 통신계 김씨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서 숨어 있었으며, 청년방위대원 민씨는 양수리 복구사업에 동원되어 가던 중 배가 아프다며 도망쳐 인근에 있던 곰산에서 피신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양평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이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유하였다. 서정지서 경찰관 최씨는 청운면 뒷산에 보름동안 숨어 있다가 청운분주소에 자수를 했다. 그 뒤 자위대에 압송당하여 양평내무서에 2주 동안 갇혀 있었다. 그 뒤 자술서를 쓰고 석방은 되었으나 낙오 국군이나 경찰관, 대한청년단 간부, 공직자들, 숙청 대상자들을 아는 대로 청운면 분주소장한테 고발할 것과 매일 청운분주소에 확인 받는 것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

 

양평지역에는 9월 24일경부터 본격적으로 북상하던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육군본부의 공식 전사에는 10월 1일 수복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국군 수복 직전에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양평지역은 한국전쟁의 전선이 오르내릴 때마다 주민들이 비극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용문면에서 발생했다. 경기도 양평 용문면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이었던 신민승은 인민군 후퇴시기인 1950년 9월 28일 마을 구장, 대한청년단장 등과 함께 양평면으로 연행되어 한강 강변에서 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양평적대세력사건”으로 불렀다. 청년의 부친 신덕문은 국군 수복 직후 양평 한강변으로 가서 시신을 지게에 지고 마을로 와 안장하였다. 그런데 한 달 뒤인 10월 27일 자식을 인민군 측에 학살당했음에도 동생이 마을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동생 일가족과 함께 학살당했다. 얼마 뒤 산에서 도피하던 동생은 목을 매어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양평의 ‘적대세력사건’은 9월 28일 발생했다. 26일 양평군 각 지역에서 소집당하거나 연행된 주민들이 양근리 한강변에서 집단희생당한 것이었다.

희생자의 수에 대한 주장이 다양하다. 양평사건에 있어서 미군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700명이었다. 그런데, 6·25 피학살자 위령탑에는 6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1952년에 조사한 KWC 명단은 338명이다. 당시 양평경찰서 사찰계 근무자는 150명이었다고 증언했다.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비교적 쉽게 확인이 가능한 조사결과는 신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338명의 KWC 명단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민군 후퇴시기 이전에 희생된 주민들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 명단은 인민군 점령기에 희생된 주민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해자는 내무서 또는 정치보위부로 추정하며 현장을 직접 목격한 생존자는 없으므로 구체적인 신원은 화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반대인 경우, 즉 학살자의 위치에 있던 주민이 잡혔음에도 전혀 이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난다. 많게는 700명까지 학살당한 양평면에서 활동했다는 창대리 자위대장(정근숙)에 대한 판결문은 인민군 점령기에 양평경찰서 경찰관의 행방불명, 양수리 대교 복구 공사에 주민 동원, 의용군 참가 독려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을 뿐으로 인민군 측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에 대한 가담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양평사건에 대한 미 KWC 자료는 부역사건 희생자 증거를 적대사건 증거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 조사자료에는 1951년 3월 미군에 의해 발견된 유골을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사건의 증거로 보고있다. 하지만 적대사건 희생자 시신은 대부분 수습되었다는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의 증언으로 보아 이 시신들은 부역사건 희생자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인민군 점령기에 발생한 학살 사건이므로 희생자들이 우익 인사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과 희생자의 신원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면 그렇게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양평사건의 경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희생자 61명 중 12명이 지방공무원인데, 이는 농업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지역의 공무원들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대부분 피난의 시기를 놓쳤다. 이들은 인민군 측으로부터 인민위원회 서기 등의 행정활동에 참여하라는 압력을 심하게 받았고, 전쟁 행위와 관련성이 약해 보이는 일반 행정 업무였으므로 저항감도 크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사의 경우 특히 이런 경향이 심했으며, 국군에 의해서든 인민군에 의해서든 권력이 교체되는 시기 피해가 가장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양평의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사건’의 희생자는 대한청년단 간부 등 우익인사출신 뿐 아니라 교사․인민위원회 서기․인민위원장․자위대장 일을 보던 주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기껏 부려먹고 갖다가 죽였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 중에는 강상면 인민위원회 서기, 보도연맹원, 양평면 자위대장, 면 인민위원장, 반장 등이 있었다. 마을 주민 이씨는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희생자의 성격을 놓고 유족 간에 갈등이 남아있다”라고 증언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양평지역의 양수리 방면에는 1950년 10월 1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남양주 지역에 진입한 국군 해병대 2대대와 5대대가 남한강과 북한강 교차지역 등에서 잔적을 소탕했다고 한다.(작명부록 제107호, 한국전쟁사 3권 797쪽) 한편, 1950년 10월 2일 국군 8사단이 양평에 진격하면서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으며, 인민군은 2시간 동안의 전투 후 용문산 산악지대로 패주했다. 국군이 양평에 진주하자 군(헌병)․경찰의 지휘 아래 대한청년단원, 청년방위대원들이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과 그의 가족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연행되어 양곡창고에 감금된 주민들은 200여 명에 이르렀다.

 

낙동강 전선을 출발하여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양평에 진입한 유엔군은 주민들의 부역혐의를 조사한다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주민들을 연행하였다. 양평읍에서는 1950년 10월 2일경 우익청년들에 의해 신애리 공회당에 감금되었던 40여 명의 양평면 덕평리 주민들이 공회당 앞과 도장굴 공동묘지에서 국군 8사단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다고 하였다. 1950년 10월 6일에는 7사단이 양평에 진입했다.

 

이들은 사찰계의 조사를 기초로 한 부역자심사위원회 결정에 의해 A급, B급, C급으로 분류되었다. 경찰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심사는 사찰계에서 했으며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경찰서장의 결재아래 떠드렁산 밑에서 집단 총살했다. 주민들은 이 희생자들이 국군 수복 후 용문산 쪽으로 피신을 하다가 잡혀 와 희생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이 국군 8사단을 2시간 동안 공격했다는 인민군은 아닌지 의심된다.

 

009.jpg 

(떠드렁산 양평읍 방면 절벽. 지형으로 보아 아래 KWC33의 사진자료의 학살지 위치로 보인다. 지금은 물안개공원이 되었다. 2008년 11월 1일 조사.)

 

010.jpg 

(KWC33 자료 내 사진자료. 1951년 2월 발견된 이 유해에 대해 미군보고서는 인민군이 저지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 사건 유해 대부분이 수습되었음을 간과했다. 미군 조사단의 법의학적 견해 역시 1950년 10월 희생자로 보았다.)

 

양평경찰서에 의한 피해 외에 각 지서에서도 경찰 또는 그들의 지휘를 받는 청년방위대, 치안대에 의해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양평면 창대리에서는 10월 23일 양동면 쌍학리 주민 심종윤 외 5명이 헌병대의 지휘 아래 하대래․김영준 등 청년방위대 양평지대원들에 의해 인민군 패잔병 및 악질부역자라는 혐의를 받고 창대리 뒷산에서 살해당했다.

양서면에서는 10월 22일 목왕리 허준․허단․이자근돌 등이 양서지서로 끌려간 후 11월 9일 양수리 강변․떠드렁산 등에서 살해당했다. 허준, 허단은 여운형 선생의 외가 쪽 인척이다.

용문면에서는 ‘적대세력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신덕문이 10월 27일 리(里) 인민위원장 신창선의 형이라는 이유로 용문면 청년방위대원들에게 끌려가 흙고개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처와 남매 등 일가족이 함께 살해당했다. 12월에는 신점리 주민 이복순이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청년방위대원 2명에 의해 쌍둥이 어린 아기들인 황금희․황금자와 함께 치안대 사무실로 끌려갔다. 당시 집에는 병든 남편 황승준이 있었다. 이 때, 치안활동을 보조하던 같은 마을 청년 박영수(당시 17세)도 함께 끌려가 마을 냇가 옆 흙구덩이에서 총살당했다. 용문지서로 넘겨진 주민들은 용문역 철길 너머에서 총살당했다. 대부분의 시신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현장에 묻혔다고 하였다. 주민 민씨(민영화)는 보통 30여 명의 주민들이 용문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매일 하루나 이틀에 걸친 심사 후 죽였으며 심사는 주로 청년방위 중대장이 주관했다고 한다. 총살장면을 직접 목격한 청년방위대원 민영화는 주민들을 총살한 곳이 용문역 뒤와 용문성당 산골짜기로 두 군데였다고 증언했다.

지제면에서는 1950년 10월경, 수곡리 유지 권영철과 최씨 집안 청년들이 위 권태억의 부친 권유성과 모친 박씨를 좌익의 가족이라며 지제지서로 연행한 후 다시 처 우복동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우복동은 이를 피해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호메기 마을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이들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수곡리에서 끌려간 주민들은 10월 21일까지 지제면사무소 옆 양곡창고에 갇혀 고문을 당했으며 그날 밤 갇혀 있던 주민들이 모두 끌려 나가 총살당했다. 이들이 희생된 곳은 지제면사무소 철길 건너편 산 밑 골짜기였다. 권오성의 부친 등 수곡리의 일부 주민들은 10월 1일경부터 청년방위대에 의해 곡수지서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지평리에서는 주민 황금용과 그의 처가 지제면사무소 뒷산에서 희생당했는데, 황금용의 처는 빨게 벗겨져 사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같은 마을 주민 김복석의 증언에 따르면, 황금용과 그의 처 등 지제면 주민들 100여 명이 부역혐의로 면사무소 창고에 갇혀 있다가 경찰의 지휘를 받던 치안대 청년들에게 철길 너머 야산 골짜기에서 살해당했다.

옥천면에서는 옥천국민학교 뒤 감자창고에 치안대가 잡혀 온 주민 20여 명이 밤에 밤나무 숲 모래사장에서 살해당했다.

 

이상 양평지역에서 확인된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인공

1950. 9. 28.

한강변 모래사장

300

인민군

부역

1950. 10. 2.

신애리 공회당, 도장굴

40

8사단

부역

1950. 10.

양평읍 떠드렁산

200

경찰

부역

1950. 10. 23.

양평읍 창대리 뒷산

6

청년방위대

부역

1950. 10.

양서,용문, 지제, 옥천

수백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