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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가평지역사건 종합

2013.06.17 16:27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222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전쟁 발발 직전, 가평에서는 1950년 1월 25일 밤 12시 인민군이 가평 목동지서를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목동지서에는 광산용 폭약 8상자와 수류탄이 보관되어 있었고 이 공격으로 지서가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빌미로 북면에서 15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었다.

 

<인민군측에 의한 피해>

 

휴전선을 끼고 있었던 가평지역의 경찰들은 전쟁의 발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출동하는 등, 이미 발생한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느라 주민들로서는 인민군의 점령 사실조차 뒤 늦게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가평을 점령하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자위대 등 인민군 측의 초기 치안활동은 보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7월 10일경 만들어진 가평 설악면 자위대는 1950년 7월 15일 전직 경찰관이던 설악면 위곡리 정씨(정재원)을 체포하여 가평내무서에 인계하였는데, 그 이유는 위 정씨가 가평경찰서 사찰계 형사 근무 당시 자위대원 본인들을 포함한 좌익계열이 탄압 당했다는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민군 점령 말기에 가평, 포천 등 경기북부지역에서는 9월 25일과 27일 사이에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사건이 집중되어 발생하였다. 9월 25일경 가평면장 박영관 등 120명의 주민들이 북면 마장리 노루모 고개(1950년 6월 말 후퇴하던 국군의 포병진지였다고 한다)에서, 설악면당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 30여 명이 사룡리 북한강 도선장에서 총살당했다. 가평 설악면에서 손씨(손장우)는 1950년 9월 27일 오전 11시경 설악면 방일리 우익인사 약 40명이 집결하여 인민위원회 간부들에 대해 보복하려는 것을 보고 부근을 통과 후퇴하는 인민군 3명에게 부탁하여 집결 중인 우익인사들에게 발포케 하여 해산시켰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부역혐의 피해>

 

가평지역이 수복되자 인민군 점령기 산에서 저항활동을 하면서 숨어 지내던 결사대원,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 인사들이 복귀하여 치안활동에 참여하였다. 1950년 10월 20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신강균(전 청년방위대장)을 대장으로 하여 "특별 제3사단(사단장 김연상 중령) 경기도 제7지편대“로 향토방위대(국민방위군)가 편성되었다. 김종학 등은 치안대를 조직해 감찰부장을 맡으면서 악질로 판단한 부역혐의자 총살에 가담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종학은 “수없이 잡아들여서 심사를 하는데 내가 직접 죽일 수는 없고 해서 대원들에게 적당히 가려서 처단하라고 했더니 그저 악질로 군 놈들은 모조리 처형한 것입니다. 그때 내가 내손으로 직접 처형한 것은 아마 아홉 명인가 됐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청년방위대 소위였던 신경균은 1950년 9월 30일 서울에 도착하여 국민방위군으로 개편된 뒤 가평군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가평에는 이미 치안대 감찰부장 김종학, 이정용, 장호석과 잔류 방위 장교 정삼득, 이영식, 배문환 등이 치안대를 조직하여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는 활동을 하였다. 연행된 부역혐의자들은 가평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가평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은 1950년 10월 25일경 가평경찰서 앞 폭탄구덩이와 강변에서 가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등에 의해 총살당했다. 당시 유치장에는 50여명이 있었으며, 유치장에 가둘 수 없는 주민들은 면사무소나 양곡창고 등에도 가두어 놓고 조사를 했다. 직접적인 총살행위는 대한청년단이 했으며⃇경찰의 지휘를 받았다. 가평경찰서 앞 폭탄구덩이에서 10여명, 강변에서 10여명이 총살당하는 모습이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설악면에서는 10월 10일경 김한호 등 10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연행되어 설악지서 유치장과 옆 창고에 감금되었다. 당시 창고는 대한청년단원들이 감시하였으며, 연행된 주민들은 가평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취조하였다. 경찰에 의해 일주일 정도에 걸쳐 조사된 결과는 가평경찰서장에게 보고되었으며 가평경찰서장의 검토 후 경찰서장의 명령에 의해 총살이 집행되었다. 총살은 10월 18일부터 1~3일 동안 설악면 사룡리 은고개 강변에서 있었다. 당시 현장에는 설악지서주임, 가평경찰서 사찰계원들이 입회하였으며, 총을 직접 쏜 자들은 의용경찰대원들이었다. 당시 20여 명이 희생되었다.

 

006.jpg 

(사룡리 은고개 강변.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학살을 목격한 저 바위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8. 2. 15. 촬영 )

 

이상의 사건을 종합해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50. 1. 말

목동지서

150

경찰

연행

인공

1950. 9. 25.

북면 노루모고개

120

인민군

인공

1950. 9. 25.

설악면 사룡리

30

인민군

부역

1950. 10. 18.

설악면 은고개

20

경찰

목격

부역

1950. 10. 25.

한강변

50

경찰

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