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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수원지역사건 종합

2013.06.14 10:01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940

<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6월 28일 용산에서 철수한 육군본부는 시흥을 경유하여 미 극동사령부 전방지휘소(ADCOM)과 함께 수원으로 이전한 다음 한강선의 방위작전을 지휘했다. 하지만 7월 3일 방어선이 무너졌고 7월 4일에는 수원에서도 철수했다. 미 전방지휘소는 6월 30일 수원에서 철수하여 평택으로 잠시 이동하였다가 미지상군의 참전과 더불어 다음날 대전으로 이동했다.(한국전쟁사 38쪽)

 

전쟁 초기 수원에는 서울과 영등포 방면에서 후퇴한 2개 사단이 주둔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총살은 6월 30일 있었는데, 수원시내에서 360여 명, 수원경찰서에 감금되었던 30여 명이 당시 희생되었다. AP통신 특파원 킹(O. H. P. King)은 7월 1일 수원경찰서장으로부터 60명을 총살했다는 발언을 들었다고 언론에 보도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목격담이 있는데, 이는 당시 수원으로 이송되었거나 검거된 재소자들 1,800여 명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미공군 첩보요원인 도널드 니콜스 대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약 1,800명의 대학살이 수원에서 있었다. 나는 전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두 대의 불도저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대는 참호모양의 무덤을 팠다. 그때 재소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손이 모두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판 무덤 언저리에 길게 줄지어 세워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채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부역혐의 피해>

 

수원에서는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기 수원시 신풍동 이기환, 이기현, 이기덕 등이 좌익활동 혐의로 우익단체에 끌려가 행방불명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상 수원지역에서 저질러진 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6. 30.

수원시내, 수원경찰서

400

경찰

특파원 킹 보도

형무소

1950. 6. 30.

1,800

니콜스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