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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김포지역사건 종합

2013.07.16 09:5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575

<부역혐의 피해>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개성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는 임진강변으로 후퇴하여 전선을 형성한다는 사단 작전계획과 달리 강화 앞바다와 김포 통진으로 철수하였으며, 6월 27일 김포-오류동 지역에서 조직을 정비하였다. 한편, 6월 26일부터 국군을 따라 강화와 김포에 들어 온 인민군 6사단이 김포지역까지 점령했으므로 행주를 도하한 국군 1사단 병력이 김포 개화산을 점령한 인민군으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다. 이 사태는 인천지역에 큰 영향을 주어 6월 28일 인천경찰서 등이 조기 후퇴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형성된 김포-오류동 전선은 7월 3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한강방어선이 와해됨에 따라 함께 후퇴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김포에 진입한 미 해병대는 9월 17일 김포비행장을 공격했으며, 이어 소사에서 전투를 치르고 부평을 수복했다. 9월 18일 김포공항 확보하고 국군 해병대 3대대가 미 해병대 5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김포와 부평에서 패잔병과 부역자를 색출 했다. 미군의 김포진입에 따라 인민군들은 9월 19일 한강을 넘어 후퇴했다. 이어 서울 진격을 시도한 미군은 행주를 건너려는 작전에서 행주산성에 주둔한 인민군 측의 강력한 공격으로 도하에 실패했으나 9월 20일 다시 시도하여 성공했다.

 

같은 날 국군 해병대 3대대는 정보참모부 예하 첩보부대 70명을 부평과 강화도에 출동시켰으며, 김포읍 안 우체국 건너편에 첩보부대 본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들이 잔적을 섬멸하면서 적정을 살피던 중 갑자기 150명으로 추산되는 적의 기습을 받았다. 9월 20일 인민군의 김포읍 반격사건으로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연행되었던 부역혐의 주민들이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포지역을 완전히 수복한 정부는 김포경찰서를 복귀시킨 후 부역혐의 주민들을 색출하여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포에서는 1·4 후퇴 직전까지 600명 이상의 주민들이 고촌면 천등고개, 김포면 여우재고개, 대곶면 소라리고개, 양동면 마곡리 한강변, 양촌면 양곡지서 뒷산, 하성면 태산골짜기 등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고촌면에서는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1일경부터 신곡리 송해붕, 장문숙, 김기산 등이 치안대에 의해 고촌지서로 끌려가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0월 12일경 김포경찰서로 이송된다면서 천등고개 방공호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판결문을 통해 희생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경우는 10월 12일 사건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임병석 등 치안대는 송해붕과 김기산 외 여러 명의 주민들을 살해하기로 계획하고 자정 무렵 각각 칼빈, M1소총,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창고에 있던 희생자들 군용통신선으로 결박한 채 김포경찰서 고촌지서 서쪽에 있는 천등고개로 연행하였다. 이들은 천등고개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미군용 참호에서 끌고 간 주민들을 일렬로 총살한 후 참호에 시체를 유기하였다. 갇혀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지서로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마을에 알려졌으나 시신을 수습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공포상황이었다. 이후 송해붕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희생자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는데, 위 송해붕의 경우도 희생된지 2년이 지난 1952년에야 천등고개 야산(지금은 김포시 상수도사업소가 있음)에서 발굴되었다. 당시 송해붕의 시신은 5구의 다른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건 당시 입고 있었던 천주교 신부 복장과 유품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같은 시기에 함께 희생된 천등고개의 희생자는 200여 명에 이른다.

 

김포면에서는 1950년 9월 18일경부터 북변리 주민 정순영, 운양리 주민 심덕기, 감정리 주민 이정순 등이 치안대에 의해 김포경찰서로 끌려가 유치장과 경찰서 내 방공호에 갇혔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8일 김포면 감정리 주민 신성철은 나무하러 갔다가 국군에게 붙잡힌 뒤 치안대로 넘겨져 김포경찰서로 끌려갔으며, 모친 이정순 등 그의 가족과 같은 마을 주민 정영현의 가족 등도 9월 28일 치안대에 의해 김포면 창고로 끌려갔다. 일자는 불명확하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마을 정순달의 가족 일부는 고촌으로 피신하던 중 고촌면 관청리에서 연행되었다.

1950년 10월 5일(음력 8월 24일) 김포면 북변리 정순영은 ‘옹짓물(감정리)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 조명순과 생후 4개월 된 딸 정정자와 함께 치안대의 지시에 따라 불려나가 샘재(운양리) 방향에 있는 곡식창고로 끌려갔으며 심사 후 부역자로 분류되어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치안대는 김포경찰서로 끌려 온 주민들의 이름을 확인한 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남성은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여성은 경찰서 내 방공호에 감금하였다. 부역혐의에 대한 조사는 김포경찰서 경찰관들이 하였는데 이들은 감금된 주민들에게 인민위원회 활동에 대한 자백을 강요하면서 고문을 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도 말채찍 모양의 흉기로 손바닥을 때리는 고문을 했는데, 당시 고문을 당했던 정순영의 처 조명순은 장사를 하는 가게에 좌익이 드나든 사실을 말하라면서 매를 맞았다.

김포경찰서는 주민들을 연행한 지 1주일이 지난 1950년 10월 11일 유치장과 방공호에 감금된 주민들을 나오라고 하여 다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이 때 조명순은 다른 집단에 속해 있는 남편 정순영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경찰은 남편 정순영이 속한 집단의 주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으나 아내 조명순이 속한 집단의 주민들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이때 조명순은 유치장 담당경찰들이 주먹밥을 받은 주민들에게 “아, 저 사람들은 오늘 밥 한 술씩 먹고 좋은 데로 가는 거야”라고 하며 조롱하는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조명순은 정순영을 포함하여 밥을 먹은 주민 100여 명이 전깃줄에 묶여 2대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후에도 김포경찰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에 대한 집단총살은 여러 차례 있었으며, 여우재고개에서만 200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포면 주민들은 여우재고개 외에도 장릉산 독잣굴 부근의 충혼탑․김포국민학교 뒷산․공군부대 등에서도 집단희생당했다..

 

대곶면에서는 쇄암리 이달재, 오니산리 김경섭․이원상 등이 대곶지서로 끌려가 창고에 갇혀 있었다. 당시 창고에는 주민 30여 명이 함께 갇혀 있었다. 1950년 11월 말경 이중 10여 명이 소라리고개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양동면에서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22일경 마곡리 주민 안삼순은 남편 이기학이 의용군에 갔다는 이유로 양동지서 경찰이 지휘하던 치안대에 의해 양동지서로 끌려갔다. 지서로 끌려간 이들은 양동지서 길 건너편에 있던 수리조합창고에 감금되었다. 당시 10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갇혀 있었고, 이성재의 모친이 매를 맞아 머리가 함몰된 모습과 이정옥의 모친 안삼순이 아래옷이 피범벅이 되어 걷지 못하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희생자들은 가족들이 밥을 전달해준 지 3일 후 사라졌다고 한다. 가족들 증언에 의하면 양동지서 창고에서 밥을 받지 않은 날이 1950년 9월 27일이었는데, 그날 이후 창고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희생사실을 짐작했다고 한다. 안삼순과 함께 끌려간 주민들 일곱 명 가운데, 당일 풀려난 이옥례와 한강변으로 끌려가지 않았던 이수영은 희생을 피했으나 안삼순 등 주민들은 희생당했다. 한강변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강물에 쓸려나갔다. 당시 창고에 갇혀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도 대부분 이들과 함께 희생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양촌면에서는 끌려간 주민들이 양곡리 지서에 갇히자 정경순의 아들 정봉운, 장경선의 처 김정숙 등 그 가족들이 옷과 음식을 날랐다. 잡혀간 지 1주일 후부터 면회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살해되었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시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양곡지서 뒷산과 여우재고개, 한강변을 찾아다녔다. 가족들은 1950년 11월 8일경 하성면 전류리 한강변에서 최인덕의 시신을 발견하였으며, 낭떠러지였던 양곡지서 뒷산에서 흙으로 대충 덮어놓은 20여 구의 시신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양곡중학교 뒷산(현재 3․1운동 만세비공원 뒤)에서도 10여 구의 시신이 3~4평 크기의 구덩이에 암매장 되어 있었다.

 

하성면에서는 하성지서로 연행된 가금리 주민 김순명 등 마을 주민 10여 명은 1950년 9월 말경 가금1리 송득선에게 끌려가 가금리 치안대 사무실로 쓰인 조제원의 집에서 매를 맞았다. 그 다음 날 김순명을 제외한 주민들은 모두 풀려났으나 김순명은 하성지서로 끌려갔다. 이 무렵 가금리에 피신해 있던 마곡리 주민 여이현과 마조리 주민 권동규도 치안대 민봉기에게 잡혀갔다. 끌려 온 주민들은 하성면사무소 뒤 두 개의 가마니창고에 감금되었다. 당시 두 창고에는 각 30여 명씩 모두 6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감금된 지 7일에서 10일 후 대부분 살해되었다. 10월 20일 창고에 가 보니 갇혀 있던 주민들이 아무도 없었다. 마곡리 민병택의 가족들도 하성면사무소 앞 치안대사무실 창고로 끌려가 5일 정도 갇혀 있다가 1950년 11월 3일 지금의 태산가족공원 맞은편 야산 숲 속에서 살해당했다. 민병택은 1950년 11월 14일 총살당했는데 희생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조리 주민 권동규․민남기 등은 1950년 10월 20일 저녁 10시경 치안대에게 끌려 나가 하성면사무소 뒷산인 태산에서 살해당했다. 유족 김충흠은 희생자들이 끌려 나간 날 저녁에 태산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유족 민경성과 함께 유골을 찾고 있었는데, 2001년 태산골짜기에서 유골과 유품을 발견하였다. 하성면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석탄리 한강변, 하성국민학교 뒤 창고, 태산 건너편, 태산 뒤 골짜기, 하성성당 골짜기 등 모두 다섯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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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태산가족공원 내 하성면 희생자 합동묘가 조성되어 있다. 2007. 6. 5. 촬영)

 

김포지역에서는 1‧4후퇴를 앞두고도 대규모 집단희생사건이 발생했다. 하성면 마곡리 강씨 일가 중 국군 수복 직후 연행된 강범수 외 4명은 태산골짜기 또는 석탄리 강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외 다른 가족들 32명은 하성지서 옆 창고에 연행된 다가 1․4후퇴 직전에 하성국민학교 뒤에서 집단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부역

1950. 10.

천등고개, 여우재 등

600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