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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기사 원문 보기 http://www.vop.co.kr/A00001201063.html


[인터뷰]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추적해온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

“부녀자는 물론 청소년과 독립운동가까지 학살… 학살은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경기도 고양시 옛 일산사거리에서 봉일천 쪽으로 2㎞쯤 가면 탄현동 개미고개 왼쪽 언덕 위로 야트막한 황룡산이 있다. 동네 약수터를 오르듯 어렵지 않은 산길을 1~2분가량 오르면 깊이가 18m가량 되는 수직굴이 나온다. ‘금정굴’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제 강점기 금을 캐기 위해 팠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곳이다. 원래 깊이는 50m가량이었지만 무너지면서 얕아졌다. ‘금정굴’에선 지난 1995년 9월 집단으로 파묻힌 유골이 발굴됐다. 다리뼈와 머리뼈 등이 마구 뒤엉킨 모습이었다. 유골 주변에선 탄피도 쏟아져 나왔다. 발굴된 유해는 153구였다. 그곳에 묻혀있던 이들은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했던 이승만 정권이 그해 9월 서울과 고양 일대를 수복한 뒤 경찰과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인민군부역자를 처단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부역자로 몰아 재판도 없이 학살을 자행했다. 한 번에 20~40여 명씩 금정굴로 끌고 가 총살한 뒤 암매장을 했다고 한다. 학살 뒤 자신들도 빨갱이로 몰릴까 노심초사하며 숨죽이며 지내왔던 유족들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용기를 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싸워왔고, 45년간 잠들어있던 진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잔혹한 학살의 역사는 이곳 금정굴 만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다. 지난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 수많은 민간인이 ‘좌익’과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그 숫자가 100만 명을 훌쩍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적게는 10여명부터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학살은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골로 간다.”, “물 먹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 말엔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잔인했던 학살의 기억이 담겨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희생자 대다수는 이승만 정권이 좌익세력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영문도 모른 채 가입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전투와는 상관없는 지역에서 학살됐다. 이승만 정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전향한 사회주의자들 관리하기 위해 만든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이란 단체를 모방해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면서 이들을 학살한 것이다. 당시 내륙에 살던 이들은 산으로 끌려가 ‘골로 가야’했고, 바닷가에 살던 이들은 바다에 수장돼 ‘물을 먹어야’했다.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항일독립운동가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보며 만들어진 표현이 바로 ‘골로 간다’와 ‘물 먹었다’는 말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 활동 이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기록을 모아 여섯 권의 책을 출간한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신 신기철 소장

하지만 아직도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민간인과 관한 진실은 대부분 파묻혀있다. 그들의 죽음은 억울했지만, 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본 유족들은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 했다.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또다시 ‘빨갱이’로 몰릴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유해를 발굴하려는 유족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당시 전국유족회 회장과 간부들을 군사법정에 세우고, 용공 분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골과 유물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골과 유물ⓒ권종술 기자

그 때문에 100만 명이 넘게 희생됐지만, 오늘까지 이와 관련한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외면하고, 모두가 침묵하며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힘써온 이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 지역의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과 나아가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 소장은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뒤에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일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등 책을 집필하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고발해왔다. 얼마 전 여섯 번째 책인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을 출간했다. 이 책엔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이들은 지난 2005년 만들어진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이 규명돼 민간인 희생자로 공식 인정된 사람들이다. 신 소장을 만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노동운동가로 활동해왔던 그가 민간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노동운동 등을 하던 당시에 ‘빨갱이’ 소리를 하며 탄압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빨갱이’라고 하는 단어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인 학살 사건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자라온 고향이랄 수 있는 고양 일산에서 ‘금정굴 사건’을 만나면서 관심이 커졌다. 이분들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한 채 고향에 남았고, 인민군 점령 당시 이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죽임을 당했다.”

당시 그들이 피난을 가지 못했던 건 이승만 정권이 후퇴를 가면서 진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난지조차 몰랐던 국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했고, 그곳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있었단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고양 파주 지역은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들에겐 전쟁 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전략상 후퇴했다. 그래 놓고 왜 국민에게 책임을 묻나. 후퇴했다가 돌아와 지역을 수복 뒤에 군인과 경찰들이 부역자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누가 한지 몰랐다. 부역한 사람 불러서 명단 작성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억울한 이들이 재판도 없이 학살을 당했다.”

지난해 충남 홍성군 민간인 유해발굴이 종료되면서 66년 전의 민간인학살 유골들이 드러났다.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일대는 1950년 10월 8일 광천지서 유치장에 구금됐던 주민 30여명이 학살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곳이다.
지난해 충남 홍성군 민간인 유해발굴이 종료되면서 66년 전의 민간인학살 유골들이 드러났다.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일대는 1950년 10월 8일 광천지서 유치장에 구금됐던 주민 30여명이 학살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곳이다.ⓒ공동조사단

이들을 학살한 건 국가였다. 하지만 국가는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은 잊히고 있다. 신 소장은 “국가가 진실을 감추면서 지나가는 세대에게선 사실과 진실이 잊혀지고, 새로운 세대에겐 왜곡된 진실이 사실인양 둔갑된다. 국가는 여전히 많은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지만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국민들에게 그대로 남아있는 공포의 기억이 우리를 침묵하게 한다.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경부선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서울에서 영남권에 이르기까지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학살을 자행했다. 
서쪽의 충청 전라지역은 경찰들을 
중심으로 후퇴하면서 학살이 펼쳐졌다.”

유족들조차도 공포에 떨며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했지만 신 소장은 “누군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며 끊임없이 사건을 파헤치고 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일하며 국가범죄와 전쟁범죄를 파헤쳐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 기간 연장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활동을 종료하고 말았다. 진상규명이 필요한 사건의 절반도 채 못한 상황이었다. 신 소장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단순한 보고서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료를 정리하고, 보강 조사를 해 지금까지 6권의 책을 만들었다. 국가는 진상규명에서 손을 놓았지만 그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최근에 5.18 발포 명령 등과 관련한 자료가 나온다. 그런데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던 자료들이다. 자료는 있었지만 정리를 하지 못해 발표를 못한 것이다. 사장돼 있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 민간인 학살 자료도 많은 기록들이 묻혀있다. 정리를 하지 못한 채 국가기록으로만 넘어가면 진실은 사장된다. 진실에 접근하기 쉽게,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정리를 하자는 생각으로 한 것이다. 진실을 보다 앍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책을 출간했다.”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그가 전하는 학살의 진실은 참혹하다. 그가 자신의 책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에 소개한 1만4천343명의 명단을 보면 민간인 학살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인천, 대구, 부산, 광주 등 대도시는 물론 경북 봉화, 전남 해남 등 전국의 마을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전쟁 전에도 영호남 지역의 빨치산 토벌 제주 4.3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나자마자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두 그룹이 죽임을 당했다. 경부선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서울에서 영남권에 이르기까지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학살을 자행했다. 서쪽의 충청 전라지역은 경찰들을 중심으로 후퇴하면서 학살이 펼쳐졌다. 국민보도연맹원 뿐 아니라 청년들도 인민군 징집 가능성이 있다면서 집중 학살했다. 한 마을 청년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 곳도 있었다. 낙동강 전선이 생긴 뒤부터는 부산 경남, 대구 등에서 집중학살이 벌어졌다. 또 경남 지역 등 인민군이 숨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며 민간인 지역에 폭격도 전개한다. 그러다 9.28 수복 뒤에는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애서 적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전투 사단이 앞에서 전투를 하며 전진을 하고, 예비사단이 뒤를 따르며 학살을 자행했다.”

지하 18m 금정굴에서 
153명의 유골과 함께 밝혀진 진실
부녀자는 물론 10대 청소년
심지어 항일운동가도 학살

학살의 잔혹함은 100만 명에 이르는 학살의 규모를 통해서도 확인되지만 희생당한 이들의 삶을 짚어가고, 개별 사건들의 이야기를 파헤치면 그 잔혹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부모였고, 자식이었던 그들은 억울하게 세상을 죽임을 당했다. ‘금정굴 사건’도 그러한 학살의 잔혹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9.28 수복후 고양지역으로 복귀한 고양경찰서는 지발적으로 부역자 체포 및 연행활동을 하던 치안대와 우익단체인 태극단을 개편해 의용경찰대를 조직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들에게 연행된 주민들은 수복 이후 10월말까지 금정굴, 한강변, 읅구덩이, 방공호, 공동묘지 등에서 총살을 당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1천 명 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정굴에선 고양경찰서가 직접 지휘 하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민간인들을 200여명을 임의처단했다. 나머지 지역에선 각 지서와 치안대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다고 한다. 금정굴은 수직굴이어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153구의 시신과 도장, 탄피, 총알, 사람들을 묶는데 썼던 군용통신선 등을 찾을 수 있었다. 수습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이 가운데는 부녀자는 물론 10대 청소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항일운동가 어수갑 선생. 일제는 1928년(소화 3년) 2월16일 찍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수갑 선생은 1950년 10월 경찰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 당하고 말았다.
일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항일운동가 어수갑 선생. 일제는 1928년(소화 3년) 2월16일 찍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수갑 선생은 1950년 10월 경찰에 의해 금정굴에서 학살 당하고 말았다.ⓒ국사편찬위원회

심지어 금정굴에서 죽임을 당했던 이들 가운데엔 항일운동가 어수갑 선생도 있었다. “1950년 10월25일 금정굴에서의 마지막 학살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고양 경찰서장이 권총으로 두 사람을 사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 가운데 한분이 어수갑 선생이다. 어수갑 선생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된 바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는 왜 해방된 조국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일까? 어수갑 선생은 1919년 강원 원주에서 교사를 하던 시절 3.1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그해 6월 중국 북경으로 피신한 뒤 북경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서울로 잡입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다. 1922년 출옥 후 언론인으로 활동한 어수갑 선생은 6.10만세 운동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6년 체포돼 3년 넘게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해방이후 김포 하성면장을 맡을 정도로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신 소장은 지난해 출간한 책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을 통해 고문과 조작을 통해 희생당한 이들을 소개하면서 어수갑 선생의 사건도 함께 소개했다. 신 소장은 책에서 “김포의 저명한 항일운동가 어수갑(1896년생)은 국군 수복 후 학살을 피해 하성면에서 고양지역으로 왔으나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950년 10월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며 “아직도 선생의 삶은 복원되지 않았으며 항일운동가로서의 명예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어수갑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실을 국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1950년 당시에 이런 학살과 관련해 재판을 한 기록이 지난 2009년 나왔다. 학살 혐의로 의용경찰대 28명이 잡혀가서 8명이 기소되고 그 가운데 2명이 사형됐다는 기록이다. 경찰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이미 국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국가는 침묵했다. 1993년 유족회가 만들어지고, 1995년 유골이 나왔어도 국가는 부인했다. 진실화해위위원해가 생기고 진정을 해 조사를 할 때까지도 국가는 인정을 안했고, 유족들은 계속 싸웠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전쟁이 난다면
적을 도울 것이란 추측만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는 지금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 힘들다.”

과거 민간인 학살 범죄에 대해 국가가 인정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과를 하는 것은 비극적인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모두를 위한 교훈을 세우는 일이다. “대량 학살의 문제를 집단의 안전과 관련한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전쟁이 나면 민간인이 많이 죽는다. 전쟁 와중에 죽는 것이 아니라 학살을 당한다. 한국전쟁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이 우리 경찰과 군인에 의해 죽어간 전쟁이 아닌 학살이었는지 모른다. 독재정권은 전쟁을 치르면서 늘 민간인을 적으로 돌린다. 박근혜 정권이 만든 블랙리스트도 같은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전쟁이 난다면 적을 도울 것이란 추측만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는 지금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 힘들다.”

서울대 의대 연구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당시의 금정굴 학살 희생자 유골과 유품들. 발굴된 유골들은 안치할 곳이 없어 서울대병원 창고에 보관해 오다가,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계약기간 만료로 2014년 하늘문공원 납골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대 의대 연구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당시의 금정굴 학살 희생자 유골과 유품들. 발굴된 유골들은 안치할 곳이 없어 서울대병원 창고에 보관해 오다가,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계약기간 만료로 2014년 하늘문공원 납골당으로 다시 옮겨졌다.ⓒ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지난해와 올해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막겠다며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연 이들의 손엔 ‘빨갱이는 죽여도 돼’ 라는 끔찍한 구호가 들려있었다. 그 구호는 민간인 학살이 과거의 역사만이 아닌 언제든지 오늘 되풀이될 있는 범죄임을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정권을 비롯한 수구세략의 시각은 1950년대와 다르지 않다. 김기춘 같은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등장하는 이들, 해산시켜버린 통합진보당 당원 등등을 같은 국민으로 안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 ‘빨갱이’를 끊임없이 오늘도 재생산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우리 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과
관련한 제대로 된 조사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지금도 1만 명 등등 희생자는 추정일 뿐이고, 
조사도 공식 사과도 이뤄지지 못했다.”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의 아픈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금정굴 사건 유족을 비롯한 많은 민간인 학살 범죄 피해 유족들은 국가가 나서서 학살의 현장을 평화공원으로 만들거나 자그마한 비석이라도 세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납골당에 임시로 보관돼 있는 유골을 이곳에 평화공원을 만들어 안치하는 게 현재 목표다. 하지만 그곳이 사유지여서 어려움이 많다. 전국 대부분의 학살 현장도 그러하다. 땅 소유주들이 비싼 땅값을 바라고 있어 유족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노근리 ‘쌍굴다리’처럼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이 2차 진실화해위원회 설치를 약속했는데. 위원회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일반의 관심도 중요하다. 그래야 진실이 밝혀지고, 제대로 된 화해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주도해 아시아 지역에서 있었던 국가기관 또는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베트남에서 우리 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과 관련한 제대로된 조사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지금도 1만 명 등등 희생자는 추정일 뿐이고, 조사도 공식 사과도 이뤄지지 못했다. 아울러 아시아 지역의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학살을 반성하고, 치유하는 중심에 한국이 설 수 있다.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

권종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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