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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서상용은 당시 일산국민학교 관리인이었으며, 큰 아들 서병철은 능곡국민학교 행주분교 교사였고, 셋째 아들 서병욱은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둘째 아들 서병숙은 일산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서상용의 조카였던 서병덕이 일산리 인민위원회 서기를 보게 되었고 둘째 아들 서병숙이 이에 협조하게 되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2일 오전 10시 30분경 성명불상의 치안대 두 사람이 둘째 서병숙이 부역을 했다며 희생자 서상용을 연행하였고, 다음 날인 3일 오후 2시경 같은 사람들에 의해 희생자 서병철이 연행 당하였으며, 5일 오전 10시경에는 임서북이 연행당했다. 그리고 10월 6일 정오경 집앞 수평대에서 운동을 하던 서병욱이 연행당했다.

 

1950년 10월 6일 오후에 연행된 지 하루 지나 임신 중이란 이유로 임서북이 풀려나왔다.

임서북은 고양경찰서 유치창고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서병숙의 소재에 대한 조사를 받으며 뺨을 맞는 등 가혹행위를 당하였는데,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마실 것도 주지 않아 갇힌 주민들이 자기 오줌을 먹는 모습과 경찰이 잡혀 온 주민들을 총 개머리판이나 장작개비로 무조건 때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희생자의 아들 서병규는 희생자들을 위해 1950년 10월 6일부터 1950년 10월 9일까지 고양경찰서로 도시락을 날랐는데, 10월 9일 오전 9시경 같은 사정으로 도시락을 가져온 마을 주민 20여 명과 함께 “창고 뒤편으로 가 있어라”하는 경찰서측의 명령에 따라 창고 뒤편으로 가 있던 중, 군 전화선(일명 비비선)에 묶여서 임시유치장으로 쓰인 창고를 나오는 주민들을 목격하였으며, 이 중 희생자들도 함께 끌려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온 주민들은 경찰, 치안대, 태극단의 호위 하에 봉일천 방향으로 끌려갔으며, 희생자의 가족들은 11시경부터 12시까지 봉일천 쪽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일산시장에 있던 희생자 서상일의 사촌 서상준과 일산시장에서 거주하던 주민 이병순, 희생자 김석권의 부친 김상용이 봉일천 쪽으로 끌려가는 주민들 속에서 희생자들을 목격하였다.

 

당일 사건 현장에서 생존한 이경선은 희생자들과 함께 묶여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서병규에게 말하였다. 1995년 금정굴 발굴시 희생자 서병욱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상업중학교 교복 단추가 출토되었다. 형사사건기록에 의용경찰대원 이진은 서병철이 10월 25일 희생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