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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희생자 박순조는 개성 출신으로 남로당에 가입하라는 압력이 심해지자 누이가 살던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누이의 소개로 김의숙을 만나 결혼한 후 고양군 중면사무소 소재지 삼정고개 부근에서 양복점을 했으며 그의 처는 한복을 만들었다.

 

동생 박순환은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고 하며, 막내동생 박순득은 의용군으로 갔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10월 3일경 아침 누군가 싸이렌을 울리면서 나오라고 했고 그 소리를 듣고 희생자들이 나간 후 경찰서 옆 양곡창고로 끌려갔다. 당시 싸이렌 소리를 듣고 주민들이 나가면 이들 중 이름을 불러 창고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 후 희생자 박순조의 처 김의숙이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것을 가지고 면회를 가서 희생자를 보았다.

5~6일 후 희생자가 보이지 않자 경찰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어보니 그 경찰은 단지 “없다”는 답만 하였다. 김의숙은 어디 다른 곳으로 끌려갔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돌아왔으며 그 뒤부터 희생자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금정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경선이 박순조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고양경찰서에 함께 갇혀 있었다고 한다. 박순조의 피해사실은 그의 처남인 태극단원 김희정, 김희옥의 증언에서 확인되는데, 정황을 종합하면, 박순조와 박순환은 10월 10일경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건 후 당시 4세였던 그의 아들 박화송은 재가한 모친을 따라 성을 바꾸고 살아야 했으며, 군 입대을 앞두고서야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부친과 삼촌의 사망 경위에 대해 당시 생존해 있던 백부 박순영으로부터 듣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