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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송포면 구산리 주민들이었던 이범인, 피원순, 피원기는 이웃해서 살고 있었다. 피원기는 순박한 농사꾼이었고, 피원순은 똑똑하고 활동력도 있었으며, 이범인은 지역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으로 마을 반장일을 봤다고 알려져 있다.


국군 수복 후 1950년 10월 20일 밤 마을에서 야경을 서고 있던 이범인이 김포에서 왔다는 치안대원 세 명에게 연행당했으며, 이어 이웃에 살던 피원순과 피원기도 함께 연행당했다. 치안대는 이들을 구산리 노루메 치안대사무실을 지나 한강 이산포에서 학살하였다.


이범인 등 치안대에게 연행당한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 가족들이 한강으로 시신을 찾으러 갔다. 이범인의 아들 이병희 등은 파주 산남리 강변에서부터 고양 행주리 강변까지 뒤지면서 무더기로 쌓여 있던 시신들을 목격하였다. 시신 무더기에는 여성과 미성년 아이들이 있었으며, 어른의 시신들은 유선줄에 묶여서 죽어있었다.


가족들은 김포 맞은편에 있던 이산포에서 피원순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발견당시 시신은 들개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얼굴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온 피원순의 가족들은 희생자가 입고 있던 옷의 허리띠를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리띠는 희생자의 아들 피영배의 것이었다. 피원순의 시신은 옮길 수가 없어 가까운 강변 둑에 매장되었다.


피원순의 시신 옆에는 두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가 있었는데, 피원순의 시신이 강변 진흙에 눌려 떠 내려가지 않은 반면. 이범인과 피원기의 시신은 밀물과 썰물에 떠내려 가고 자리만 남아 있었다.


피원기, 피원순, 이범인은 한 날 같이 묶여 희생되었으므로 같은 날인 음력 9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족들은 사건 후에도 송포지서에 수시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으며, 이범인의 아들 이병희는 1․4 후퇴 직전 치안대 피영권이 쏜 총을 맞았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이들 외에 양용한도 한강변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