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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황뇌성, 황을성 형제는 현천리 복령골에 살았는데, 마을에서는 황뇌성을 황노성, 황을성을 황문성으로 불렀다.

형 황뇌성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동생 황을성은 철도 기관과에서 기관장을 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점령하자 형 황뇌성이 리 인민위원장 일을 맡게 되었다.
9․28 수복이 되자 황뇌성은 송추로 피신했으나 잡히게 되었고, 황을성은 황뇌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10여 명의 치안대원들에게 매를 맞았으며 일주일 후 다시 치안대에 끌려가 그들이 사무실로 쓰고 있던 현천리 건너말(상촌) 방앗간 창고로 연행되었다. 당시 창고에는 열댓명이 감금되어 있었는데, 현천리 주민들 뿐 아니라 근처 마을인 덕은리, 향동리, 화전리 주민들도 있었다.


황뇌성은 1950년 9월 30일 다락고개에서, 황을성은 10월 1일 현천리 공동묘지에서 학살당했다. 황뇌성의 희생사실은 치안대원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으나 낮에는 무서워 시신수습을 못하다가 밤중에 시선을 피해 수습하게 되었다.


황뇌성, 황을성이 연행당하자 치안대원들이 항아리, 옷, 쌀, 가마솟 등에 압류딱지를 붙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이들이 희생된 후 이를 모두 가져갔다. 유족들은 며칠 뒤 황을성의 재산은 다시 찾아올 수 있었으나 황뇌성의 재산은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사건 후 치안대는 황뇌성, 황을성의 가족들을 끌고 가 죽이려다가 주민들의 사정으로 풀어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