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고산돌(중면 백석리)
2013.10.24 14:41
희생자 고산돌은 김포에서 살다가 1950년 3월 고양군 중면 백석리 백신마을로 이사 와 농사를 지었다. 6․25 전쟁이 나자 김포로 피난을 가려 했으나 배가 없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백석리에서 살던 조카 고준수, 고준구가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쟁 중 행방불명된 일이 있었다. 국군 수복 후 치안대원들이 이들의 행방을 찾는다며 희생자 고산돌을 연행했다. 1950년 10월 초 점심식사 직후 총을 멘 치안대들이 고산들을 비비선으로 묶어서 끌고 갔다. 당시 희생자의 처 김어진이 매달리면서 따라가자 치안대가 총부리로 찌르면서 마치 쏠 것처럼 총을 겨누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바로 끌려 가는 것만 보았다.
그를 끌고 간 치안대는 백석리 치안대(대장 박인학)이었고 끌고 가던 4~5명의 치안대원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팔에 완장을 찼고 두 명이 총을 메고 있었다.
연행된 지 2~3일 후 고양경찰서로부터 밥을 가져오라는 연락이 왔으며 도시락은 희생자의 큰 딸 고정임이 열흘간 날랐다. 열흘째 되던 날 고양경찰서 경찰관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갔으니 더 이상 밥을 가져오지 마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가족들은 고양경찰서로 끌려간 주민들은 모두 죽었다는 소문에 따라 어디선가 죽었을 것으로만 짐작했을 뿐 1995년 유골이 나올 때까지 금정굴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희생자가 초기에 연행된 지 12~13일 후에 희생되었으므로 10월 12일경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사건 후 희생자의 처도 행방불명된 조카들을 찾아내라며 한 달 동안 고양경찰서로 끌려가 손가락에 총알을 끼워 조이는 고문을 당했다.
허창 등 치안대원들이 고준수 등 행방불명된 사촌들의 땅을 빼앗아 갔다. 허창이 사촌들의 땅을 점유하자 모친께서 경찰서를 찾아가 이 사실을 바로 잡아달라고 진정했는데, 경찰서는 ‘고씨 성이 아닌 김씨 김어진이 주장하니 안 된다’ 고 오히려 협박을 당했다. 결국 1980년 특별조치법에 의해 허창 소유의 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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