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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강흥환(의용경찰대)의 기억

2013.10.29 14:51

관리자 조회 수:1180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잡화상을 하였다.


6․25 전쟁 전 대동청년단 검찰대 오(伍)장, 대한청년단 경기도본부 단부 체육부장, 민보단 훈련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서울에 피신하여 있다가 7월 14일 일산의 친구들이 귀향해도 좋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당시 민청에 가입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지목을 당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민청원으로 가입하여 8월 8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 뒤 일산리 자위대장으로 있던 조병세가 피원용과 나를 체포하려 한다는 연락을 받고 파주로 피신하였다.


국군에 의해 수복이 되자 10월 2일경 귀향하여 치안대를 조직하고 3일부터 고양군 중면 치안대 감찰부 차장으로 있었다. 10월 6일경까지 치안대원으로 있으면서 중면 각리 치안대에서 연행한 부역혐의자 40여 명을 인계받았으며, 다른 주민 40여 명을 직접 체포하여 고양경찰서에 유치하였다. 이들 80여 명은 10월 6일경 복귀한 경찰에게 인계하였다.


경찰이 복귀하자 치안대가 의용경찰대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치안대원 중 4명이 부역혐의를 받아 검거되었다. 이들 4명 중 3명은 석방되고 1명은 석방되지 못했다.


의용경찰대에서는 사찰심사반 제1반 책임자로 있으면서 각 리 구장이나 반장이 제공한 정보를 받은 고양경찰서 사찰주임 이영근의 명령으로 주민들을 체포했다. 당시 제1반은 15명의 주민을 직접 검거하였고, 10월 10일경 고양경찰서 송포지서에 검거되어 있던 주민 101명을 고양경찰서로 이송하기도 했다.


검거는 주로 사찰심사반이 하였고 취조는 주로 경찰관들이 했다. 경찰관의 취조활동을 돕던 의용경찰대원은 이계득, 방규순 두 사람뿐이었다. 검거된 주민들은 A, B, C로 분류되었으며, 고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200여 명의 주민을 감내고개 금광굴에서 총살했다.


본인은 3차례 총살에 가담했다. 당시 총살에 가담한 치안대원은 이진, 이광희, 조병태, 엄진섭, 강신원, 조병세, 김효은이었며, 고양경찰서에서는 사찰계 형사 오기섭, 문○○이 가담했고 태극단에서는 10여 명이 가담했다. 피해자 60여 명을 총살하는 현장에 있었으며, 직접 총살한 것은 그 중 5명이다. 10월 25일 20여 명을 즉결처분할 때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2명을 직접 총살했는데 그 피살자는 서장의 가족을 죽이고 집을 점거하고 있던 자라고 하였다.


피살자 대부분은 고양군민이지만 전라도 등 타지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1950년 10월 10일부터 25일 사이의 총살당한 자는 일산리 이기철, 김석권, 김광제, 윤영규, 한창석, 김암권, 이한상, 김윤권, 장성의, 서병철, 서병철 부(서상용), 윤영만 모친, 이종한 모친, 이경학, 백석리 허진임, 덕이리 최단, 성석리 홍기원, 장항리 임상준 등 약 2백명이다.


총살한 자와 총살에 참여한 회수는 순경 오기섭 2회, 순경 김종순 1회, 순경 김천국 2회, 순경 손○○ 감수 3회, 의용경찰대원 이진 5회, 이광희 3회, 조병세 2회, 조병태 2회, 엄진섭 2회, 김효은 2회, 양재남 1회, 신현섭 1회, 최상철 1회, 강흥환 4회이며, 당시 참여한 태극단원은 약 20명이다.


총살은 모두 사찰주임과 고양경찰서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합법적인 줄 믿고 있었다. 고양경찰서에서 A, B, C 구분을 하여 총살을 했으며 의용경찰대는 동원되어 같이 집행한 것 뿐이다.


극렬 좌익분자가 인민군 침입 시 했던 행위를 생각하면 당연히 총살하여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특히 법에 의한 판결은 없으나 경찰에서 지시한 일이니만치 결코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양심에 비추어 조금도 가책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