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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송병용(사찰계 순경)의 기억

2013.10.29 14:33

관리자 조회 수:1379

1949년 10월 22일 경기도 순경으로 발령되어 1950년 2월부터 고양경찰서에 근무하였다.

 

인민군 점령기에는 시내에 숨어 있었다.

1950년 9월 20일경 수색역전에서 고양경찰서 경비주임 석호진(石豪鎭) 경위를 만나서 능곡과 중면 백석리에서 치안대원 약 50명, 태극단원 약 30명을 모았으며 이들을 데리고 1950년 10월 2일 중면 일산리에 있는 본서로 갔다. 그 후 석호진 경비주임은 곧 인천해병대로 가고 본인만이 치안대 및 태극단원들과 같이 경비를 하였다.


10월 3일경 순경 정청화(鄭靑和), 형사 황재연(黃在淵), 형사 유모가 복귀하였다. 10월 8일까지 치안대원 및 태극단원들이 고양서 관내에서 잡아 온 부역혐의자가 50~60명이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이 실제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사찰주임 이영근 경위는 10월 8일에, 서장 이무영 경감은 10월 11일에 각 귀서(歸署)하였고 그 동안 서원도 30여 명 모였다.


10월 9일 떠도는 말에 따르면 10월 8일 오후 6시경 치안대원과 태극단원들이 연행한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이는 고양경찰서 경찰들이 복귀하기 전 죽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찰주임이 8일 오후 3시경에 복귀했으므로 학살 사실을 알았을 수 있으나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바는 없다.


10월 15일경 사찰계 형사 김한동이 60여 명을 취조한 결과 14~15명을 죽이기로 하여 이에 가담하였다. 주민들의 양 손을 뒤로 묶어 대로를 피하여 2km 북쪽에 있는 금광굴로 가서 동행한 경찰관과 태극단원이 휴대했던 M1총으로 사살하고 시체는 굴속에 넣어 버렸다. 이때 동행한 형사는 김종봉 외 사찰계 4~5명과 태극단원 10여 명이었다.


10월 17일경에도 재감자 26명을 같은 방법으로 사살하였다.


부역자의 재산은 시국대책위원회에서 몰수했는데, 역산을 지정하고 그 목록을 작성할 때에 2일간 입회한 적이 있었다.
(출처, 형사사건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