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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건 당시 송포면 덕이리 할미마을에 살던 형 김재환은 농사를 지었고, 동생 김영환은 철도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같은 마을 주민 유병문과 정수연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곡식 이삭을 세는 등의 부역을 주민들에게 강요하였다. 당시 집에 와 있었던 희생자 김영환은 이에 못 이겨 며칠 동안 참여하다가 도망하였으며 9․28 수복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마을에서는 인민군에 의해 유씨 집안사람 한 명이 납북 중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유씨 집안에서는 이 희생의 원인이 덕이리에 사는 김씨들 때문이라며 치안대에게 고발하였다.


한편, 국군 수복이 되자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을 하던 정수연, 유병문 등이 다시 치안대로 활동을 하면서 인민군 점령아래에서 자신들의 작업지시를 받던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 3일경 희생자들은 치안대에 의해 바로 고양경찰서로 끌려갔으며 가족들이 매일 도시락을 날랐다. 처음에는 밥도 안 받고 매만 맞고 돌아왔으나 그 후 다시 며칠을 찾아가 사정해서 밥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흘 즈음 되었던 10월 12일경 고양경찰서는 희생자가 ‘문산경찰서로 갔다’라고 하면서도 밥은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에는 밥도 받지 않았다. 가족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갔다고 하면서도 어디로 갔는지 이야기 해주지 않자 여기 저기 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을 했다. 그리고 금정굴로 끌려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1950년 10월 13일 할미마을 철뚝 건너편(현재 일산역과 이마트 사이)에서 작은 가게를 하던 먼 친척이 손을 뒤로 묶인 채 철길을 따라 끌려가던 희생자 김영환을 목격 하였다. 당시 끌려가던 주민들은 20여 명이었고 경찰과 치안대원 6명 정도가 앞뒤로 호송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서는 10여 명 정도가 함께 끌려갔는데, 안씨네와 김천흥, 김기범의 부친 등이 희생당했다.
사건 후 희생자들의 모친이 송포 치안대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으며, 살림살이는 모두 치안대원들이 빼앗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