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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어수갑은 어씨 집안의 7대 종손으로 1896년생 애국지사, 독립투사이며 민족주의 사상가로서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2년(대정 10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23년 석방되었다.

석방 후 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1927년 3월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초대 하성면장을 지냈고 1948년 북한지역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김포대표로 참가 하였으며 이후 민전 서기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어수갑은 전쟁이 났을 때 하성면에 있었지만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국군이 김포 하성면을 수복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다시 어씨 집성촌이었던 고양군 중면 일산리 진밭으로 피신을 했으나 고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950년 10월 23일경 금정굴에서 희생당했다.


하성면 석탄리에 어씨들이 살아 온지 200년 되었으며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 진밭에는 550년 되었다고 한다.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은 어수갑에 대해

“魚秀甲, 魚成龍, 1896~? (조선공산당 당원)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교동(校洞)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했다. 1909년 4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휘문의숙 예비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4월부터 1913년 3월까지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졸업했다. 이후 포천 청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3월 청성학교를 그만두고 1916년 5월 철원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7월 퇴직했다. 1922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화요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1구 제7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에 배속되었다. 7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4월 만기출옥했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김포군 대표로 참석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을 지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