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조병세(의용경찰대)의 기억

2013.10.29 16:12

관리자 조회 수:4647

1946년 9월경 철도공장 직공으로 근무하던 중 전평에 가입되어 철도파업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때 무단결근했다는 이유로 21일간 철도경찰에 검거되었다. 이 때문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1950년 6월 15일 제1차로 탈맹하였다. 한편, 1948년 일산에서 식료품상을 개업하여 운영했으며 민보단에 가입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7월 1일부터 5일간 보안대 대원으로 경비를 보았으며 이후 5일간 일산리 민청위원장으로 있다가 7월 20일경 의용군을 뽑는다고 하므로 그 책임을 맡을 수 없어 사퇴하였다. 그 뒤 보안대가 자위대로 개편되자 국군 수복 직전까지 일산리 자위대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일산리 대동청년단 총무 이기원, 대한청년단장 김남식, 고양경찰서 후원회장 김경진, 일산병원 원장 이병택, 구세병원 원장 안병기, 대동청년단 후원회원 고광은, 강충복 등 20여 명의 우익인사들에게 피신하라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국군 수복 당시 9월 20일경부터 능곡에서 조직된 치안대에 가입하였으며 10월 초순 경찰이 복귀하자 재편된 의용경찰대원으로 경찰에 협력하였다.


10월 초순 치안대장 이학동의 명령에 의하여 정영학, 김영한을 체포하였다. 10월 6일경 의용경찰대원이 된 후로는 10월 10일경 사찰계장 이영근의 명령을 받아 중면 마두리 인민위원장 최의현 등을 체포하였다.


총살에는 2회 참여하였다.

제1회는 10월 15일경 사찰계에서 명령하는 성명미상자 5명을 순경 김천옥, 순경 성명미상자 1명 외 의용경찰대 대원 신현섭, 엄진섭, 강흥환, 김효은과 함께 경찰서에서 약 3마장 쯤 북방에 있는 광산굴에다 데리고 가서 굴 옆에 앉히고 데리고 갔던 계호원 전부가 엠완 또는 카빙총을 발사하여 죽이고 그 시체는 굴속에 넣어 버렸다.

제2회는 10월 25일경 달밤에 피검자 20여 명을 경찰 약 10여 명과 의용경찰대원 엄진섭, 강흥환 등과 함께 자동차에 태워가지고 금광굴에서 사살했다. 당시 굴 있는 산 밑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밤이어서 잘 보지 못했으나 그 때는 사찰주임과 서장도 총살하고 갔다는 말을 김효은과 강흥환으로부터 들었다.

 

경찰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었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