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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고창지역사건 종합

2013.06.26 09:48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018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의 명령에 따라 연행된 고창지역의 국민보도연맹들이 고창경찰서 유치장 4곳을 가득 메웠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1950년 7월 6일 경찰에 의해 이중 일부가 방장상 인근(신림면 가평리)에서 총살당했다. 학살은 1950년 7월 20일경에도 있었는데, 이들은 지도자급 인사들만 학살당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사찰계 근무자는 이들이 희생당한 곳이 고수면 부곡리 지수재 고랑이었다고 증언했다. 7월 20일은 고창경찰서가 목포로 후퇴한 날이다.

<인민군측에 의한 피해>

 

국군 수복을 앞두고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해 다시 주민들의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고창지역은 전선이 형성되지 않았고, 전투지역이 아니었다. 인민군이 주둔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인민군이 철수’했다는 주장은 인민군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편, 유엔군은 9월 20일 군산 앞바다 오식도에 상륙했으며, 미 25사단에 배속된 전북경찰국 선발대는 9월 28일 전주를 수복했다.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후퇴하던 내무서원 등은 9월 26일부터 각 분주소를 통해 소집 또는 연행당한 주민 70~120명을 9월 28일 정읍방향 석교리 야산과 교촌리 성산(성두산) 2곳에서 4차례에 걸쳐 집단살해했다. 고창인민위원회는 9월 28일 해산했다고 한다.

 

<11사단 사건>

 

고창지역에서는 인민군 측이 후퇴했으나 유엔군의 진주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수복 작전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다른 지역과 달리 수복 초기 국군에 의한 희생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호남지역은 경기, 충청지역에 비해 경찰서의 복귀도 늦었으므로 10월에 집중되었던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1사단이 지휘하는 토벌작전에 의해 대량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고창지역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와 고창경찰서, 향방대원, 군경유가족회, 학도의용대원, 의용경찰대원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학살당했다. 고창에서 저질러진 국군 11사단사건은 집단학살사건이 집중된 시기로 보아 크게 세 차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차

 

제1차는 1950년 12월 22일 전후의 시기로 피난하던 해리면과 심원면 주민 200~600명이 만돌리 해변 등에서 학살당한 사건이 대표적인 것이다. 제2차는 1951년 1월 5일 전후의 시기로 무장․대산․공음면 주민 400~500명을 선동리 옥산저수지 부근에서 학살당한 사건이 대표적이며, 제3차는 3월 10일 전후의 시기로 100여 명의 심원면 주민들을 사등천변 등에서 학살당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11사단의 지휘를 받던 고창경찰서의 토벌작전과 부역혐의사건 역시 이 세 번의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토벌작전이 단일한 지휘체계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1950년 10월 30일부터 12월 말까지 고창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벌작전 초기에 고창에 진입한 군인들은 11사단 13연대였다. 13연대 군인들은 10월 30일 고창에 진입하여 무장면 덕산리 백양마을을 공격했으며 이어 마을 뒷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을 추격하여 체포한 뒤 총살했다. 당시 군인들에게 여러 명이 잡혔으나 노인들은 돌려보냈고 유홍종 등 청년 5명이 총살당했다.

11월 말에는 11사단 13연대와 교체된 20연대가 대산면에 진입했다. 이들이 진입한 11월 30일 공음면으로 피난하던 대산면 대장리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 잡혀 희생되었다. 먼저 가던 대장리 주민들은 군인들의 피난민 포위망을 무사히 통과했으나 그 뒤를 따르던 주민들은 공음면 덕암리 평촌마을 들녘에서 걸려 살해당했다. 당시 7명이 희생되었다. 12월 2일에는 대산면 지석리 정재국 등 5명의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 붙잡혀 마을 옆 야산에서 살해되었다. 해리면에서는 1950년 11월 말 인민군으로 위장한 해리지서 경찰에게 마을사람 30여 명이 같이 붙들려가 10여 명이 총살당했다.

무장면에서는 1950년 12월 13일 무장면 원촌리 오인대 등 3명의 청년들이 경찰서로 끌려간 뒤 교흥리 인근에서 사살당했는데, 시신 발견 당시 오인대는 사살당했고 다른 2명은 불에 타 죽었다. 다음 날인 12월 14일 경찰에게 쫓기던 무장면 송계리 주민 2명이 송림산 중턱에서 머리에 총상을 당해 구덩이에 매당당한 채 발견되었다. 12월 15일에는 토벌경찰을 피해 피난하던 무장면 신촌리 주민들 중 남성 10여 명이 무장지서 경찰에 의해 공음면 ‘여시매’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무장지서로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12월 29일에는 굴속에 피신했던 무장면 송현리 김원철 등 7명의 주민들이 방위대에게 발각되었으며 경찰에게 연행되어 한재산에서 총살당했다.

 

20연대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은 12월 22일부터 전개되었는데, 주로 선운산 인근 해안마을인 해리면과 심원면을 공격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12월 22일 오후 군경합동토벌대가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등 서남쪽 3개 방향에서 공격하였다. 토벌대는 박격포와 총을 쏘면서 진입하였으므로 겁에 질린 주민들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바닷가로 도망쳤다.

해리면 주민들은 동호리 바닷가와 심원면 방면으로 도망하던 중 붙잡혀 사살당했다. 해리면 하련리, 왕촌리 주민 30여 명은 진주하는 군인을 피해 해리천을 건너 심원면 방향으로 피난하던 중 군인들에게 잡혀 고전리 당산나무 아래로 끌려갔다. 군인들은 “한 놈 당 세 방씩 쏘아라”라는 명령에 따라 총을 쏘았다. 이곳에서 20여 명이 살해당했으나 일부 주민들이 극적으로 살았다.

심원면 두어리 주민들은 만돌리 바닷가로 도망치다 희생되었다. 당시 바닷가는 시야가 트인 갯벌이었으므로 피신할 곳이 없어 모두 사냥 당하듯이 조준 사살되었다. 두어리 주민 7명 등 40여 명은 황학산 방면에서 들어오는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잡혀 ‘작은달구지’로 끌려가 총과 칼로 살해당했다. 만돌리 바닷가에서 생포된 50여 명은 개명산 아래로 끌려와 기관총으로 살해당했다.

같은 날 11시 토벌대는 왕촌마을에서 구동호마을로 이동하면서 발견하는 즉시 주민들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10여 명이 학살당했다. 구동호마을에서 피난하던 주민 37명은 마을 뒤 일제강점기에 파놓은 두 개의 굴에 숨어 있다가 마을마다 수색하던 군인들에게 붙잡혀 선창가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시간 신동호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은 피난해 있던 주민들을 마을에 있는 삼양사 소금창고에 가두었다가 새벽 1시경 차례로 끌어내 해수래 성교에 1줄씩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시신은 썰물에 떠내려갔으며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시 희생자가 50여 명이 넘었다. 인근 조지산과 방축리 부근으로 피신했던 해리면 왕촌리, 안산리, 사반리 주민들도 군경토벌대에 잡혀 살해당했다. 22일 하루 동안 주민들이 주로 희생당한 곳은 심원면 고전리 당산나무 밑, 만돌리 개명산 앞, 만돌리 바닷가, 작은 달구지, 그리고 해리면 동호리 바닷가였다.

 

다음 날인 12월 23일에도 군경의 토벌작전은 계속되었다. 전날 소위 ‘동짓날 사건’ 후에 군경토벌대는 동호국민학교에서 숙영하고 다음 날 삼양사 둑방길로 나가 심원면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했다. 심원면 하전리에서 전날 하루 운 좋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주민 30여 명이 12월 23일 배를 타고 부안으로 가기 위해 좌치나루에서 배를 탔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배는 바로 좌초되었으며 이어 경찰들이 전마선을 타고 나와 이들을 모두 사살했다. 한편, 심원면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연화리 도천마을로 피난했던 고전리 주민들도 희생되었다. 20연대의 해리면, 심원면 토벌작전으로 인해 작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6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월 24일에는 상하면 하장리 주민들이 피난 중 경찰토벌대에 의해 용대리 용대마을 부근에서 사살되었다. 이날 경찰이 저수지 건너 마을 뒷산에서 오는 모습을 보고 마을 주민들이 홍농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뒤 쳐져 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총살된 것이었다.

 

11사단은 해리면과 심원면에 대한 집중 공격을 끝낸 뒤에도 소규모나마 대산면 등 일부 지역에 대한 작전을 계속했다. 이들은 1950년 12월 28일 중산리 곡천마을과 성남마을에 진입하여 가택수색을 하면서 피난하지 않고 집에 남아있던 이용범 등 3명을 곡천마을 앞 논에서 총살했다. 성남마을에서도 선기상 일가족 등 5명이 무장면으로 피난 가던 중 붙잡혀 마을 뒤 소나무 숲에서 살해당했다. 12월 29일에는 영광군 홍농면 주공순이 토벌을 피해 아들을 업고 친가인 상하면으로 오던 중 토벌대에게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산’ 아래 바닷길에서 사살당했다. 12월 31일에 상하면 석남리 장복득은 영광군 홍농면으로 피난하던 중 ‘덕개미산’에서 살해당했다.

 

제2차

 

1951년 새해에 들어서면서 제2차시기로 구분되는 ‘무장면, 대산면, 공음면 등에 대한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었다.

 

1월 5일 20연대 2대대 6중대(대위 이용배)와 고창경찰, 고창학련원, 군경유가족회원, 향방대원 등 군경토벌대가 무장면, 대산면, 공음면을 포위했다. 그러자 각 마을 주민들이 공음면 선동리 방향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러나 각 길목마다 이미 잠복하고 대기하던 군경토벌대에게 잡혀 선동리 선산마을 옥산저수지 앞밭으로 끌려 왔다. 붙잡힌 주민들은 오후 3~4시경까지 엎드린 채로 토벌대와 군경유가족들로부터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토벌대원들은 부녀자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수냉식 기관총 2정이 설치되었고 희생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얼마 후 ‘산 사람은 일어나라. 천운을 타고 났으니 살려 주겠다’라고 하자 일어난 사람이 있었는지 또 다시 총을 쐈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떡메로 때려 ‘확인살해’했다.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를 알고 있다는 주민 20여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했다. 이 외에도 집에 있다가 토벌대에게 살해당한 주민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이날 하루 동안 선동리 선산마을 옥산저수지 부근에서 집단살해당한 희생자는 400~500명에 달했다.

 

017.jpg 

(공음면 선동리 위령탑공원에 설치된 희생자위령탑. 공원은 500여 명이 희생된 장소에 2007년 조성되었다. 2011년 4월 4일 조사.)

 

다음 날인 1월 6일 군경토벌대는 공음면에 이어 상하면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20연대 2대대 6중대를 비롯한 군경토벌대가 상하면 하장리, 석남리, 자룡리에서 수색작전을 벌여 집안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살해했다. 주로 하장리에서 붙잡힌 주민들은 인근 상하국민학교 옆 공터에서 희생되었는데 당시 희생자는 18명에 달했다. 이 중 12명이 하장리 주민이었다. 자룡리와 석남리 주민들은 갈산마을에서 희생되었다. 갈산마을에는 80여 명이 끌려왔는데 이중 여자도 20여 명 되었다. 이들은 돌방구재와 왕재에서 희생되었다.

 

1월 5일과 6일의 학살 후 토벌작전은 잠시 쉬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개별적인 피해는 계속되었다. 1월 9일에는 영광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성송면 암치리 뒷산 생말골로 피난했던 대산면 회룡리 주민들 중 강봉원이 군인들에게 총살당했으며, 1월 12일에는 상하면 용정리 노준섭이 피난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다가 마을에 들어온 군경토벌대에 의해 집 뒤에서 총과 칼로 살해당했다. 1월 15일에는 피난하던 공음면 건동리 주민 등이 장성군 삼계면 고산으로 피난 갔다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대장촌 잔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당시 고산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150여 명에 달했는데 건동리에서 피난했던 희생자는 김기호 등 6~7명이었다. 1월 23일에는 만돌리 현종수가 심원면 연화리 수리답 부근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현장에는 시신이 여럿이 있었다. 같은 마을 장종술의 시신은 저수지에 빠진 상태였다. 1월 27일에는 심원면 용기마을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주민 4명이 살해당했다. 주민들이 마을 남쪽 안산으로 피난했는데 삼망산 방향에서 군경이 몰려오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뒤 쫓아 온 경찰이 주민들을 연행하여 살해했다. 2월 3일에는 용기리 오태랑이 심원면과 부안면 사이 좌치포구에서 살해당했으며, 2월 4일에는 용기리 오태영, 임남권이 고창경찰서로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 2월 15일에는 심원면 월산리 박경오가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당했다.

 

같은 시기인 1951년 1월 10일 부역혐의를 받아 고창경찰서에 잡혀있던 주민들도 총살당했다. 당시 고창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주민 13명이 부역자로 몰려 고창경찰서 옆 흥해정미소에 감금되었다가 모양성 백토굴 공동묘지에서 집단살해당했다. 이들은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주민들로 1950년 10월 중순 군경의 수복작전을 피해 인근 고창면으로 피난 생활을 하던 것인데, 이중 13명이 부역자라며 고창경찰서에 잡혀가 경찰서 옆 흥해정미소에 갇혔다가 희생된 것이었다. 이외에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아산면 하갑리 정만수가 국군 수복 후 부역자들은 자수하라는 소문을 듣고 자수하여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12월 20일 호명당해 불려나간 뒤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1951년 1월 1일에는 피난에서 돌아 온 해리면 왕촌리 주민들이 경찰과 학도대에게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당했다. 1월 12일에는 해리지서 소방대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 수십 명이 ‘백두재’에서 집단살해되었다. 1월 18일에는 해리면 광승리 최동석, 김채선 부부가 동호출장소 경찰에게 연행된 후 바닷가에서 희생되었다 1월 26일에는 해리지서에 잡혀 간 심원면 만돌리 김대현이 신동호에서 학도대원에게 총살당했다. 1월 27일에는 광승리 배범장이 해리지서에 연행된 후 희생되었으며 같은 날 동호출장소에 야경을 나갔던 해리면 광승리 상부마을 허환, 허욱 형제가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같은 날 심원면 주산리 황두암, 황학민 형제가 동호출장소에 연행된 뒤 희생되었다.

 

대산지서는 1951년 1월 24일 이용순 등 공음면 예전리 주민 3명을 연행하여 조사하다가 일부 주민들을 집단희생시켰다. 이용순이 인민군 점령시기 마을 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고 한다. 1951년 2월 26일 위 이용순과 함께 연행되어 조사 받았던 예전리 문준환이 대산면 연동리 주민 3명과 함께 대산지서 경찰에 의해 군유오거리에서 총살당했다. 1951년 3월 12일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장화례와 손자 최큰놈이 경찰에게 마래마을 앞 큰샘에서 살해당했다.

 

부안지서는 1951년 1월 3일 심원면 하전리 주민들을 집단살해했다. 사건 당일 새벽 장수강 건너편의 부안지서 경찰이 심원면 하전리로 건너와 총을 쏘아가며 주민들을 서전마을 당산등으로 집결시켰다.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이희성과 박소자 부부가 총살당했다. 당시 3개 부락에서 모인 주민들은 수백 명에 달했는데 이 중 빨치산의 처라며 ‘나성녀’를 살해했으며 이어 서종엽과 양지환을 총살했다. 이후 청년 10여 명을 끌어 내 부안면으로 끌고 갔는데 이중 7명이 부안면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사건의 희생자는 모두 14명이었다.

 

고창경찰서의 독자적인 토벌작전 역시 1951년에도 계속되었다. 1951년 1월 1일에는 무장면 강남리 원촌마을 안일남 등 5~6명의 주민들이 무장지서 토벌대원들에게 잡혀 무장지서 쪽으로 가던 중 원촌마을 앞 논과 산마루턱에서 총살당했다. 1월 2일에 무장지서 토벌대를 피하던 옥산리 백양리 선동리 주민 10여 명이 백양리 당산모퉁이에서 살해당했다. 같은 날 옥산리 주민 7~8명이 토벌대로 마을에 들어 온 학도대 등에게 구타를 당한 후 살해당했다. 2월 2일에는 만화리 봉촌마을 주민들이 경찰토벌대를 피해 피신했으나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이 경찰에 붙잡혀 마을 앞에서 집단살해당했다.

 

제3차

 

11사단은 3월에 접어들어 다시 대규모 학살을 수반하는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3월 4일(또는 3일) 상하면 자룡리를 공격하자 총소리를 들은 상하면 자룡리 주민들이 ‘고리포산’과 전남 영광군 홍농방면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미처 피난을 못한 주민들이 ‘비둘기 모퉁이’와 ‘고리포산’에서 군경과 마주치게 되어 주민들이 ‘비둘기굴’로 몸을 숨겼으나 이내 경찰에게 끌려갔다. 이후 자룡리와 용정리에 진입한 군경은 마을에 남아있던 젊은 남성들을 끌어내 ‘비둘기 모퉁이’로 끌고 가 ‘비둘기굴’에서 끌려나온 주민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사살했다. 이날 희생자는 60여 명에 달했다.

 

같은 날 용정리에서 연행된 주민 5~6명은 해리지서로 끌려간 뒤 3월 22일 돌아왔다고 한다. 학살에 가담한 군인은 11사단 20연대 2대대 8중대였다. 3월 10일에는 군인들이 심원면 월산리 주민들을 공격하여 사등천변에서 8명을 잡아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같은 날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은 월산리 주민들이 바닷가로 나가 ‘가막바위’와 해변가 바위틈에 숨었다. 그러나 ‘가막바위’가 밀물에 잠기면서 익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이 사등천변으로 올라왔다. 이를 지켜보던 경찰이 이들을 붙잡아 현장에서 12명을 사살했다. 바닷가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주민 50여 명은 심원국민학교로 연행되었다가 대부분 풀려났으나 김응섭은 해리면 동호리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3월 13일에는 이날 오전 10시경 두암저수지 부근에서 총성을 울리며 토벌대가 상하면 용대리 택동마을에 진입하였다. 토벌대는 집집마다 수색을 하면서 집에 남아 있던 주민들에게 총을 쐈다. 마을에 남아있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마을 앞으로 집결되었으며 곧 마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모두 엎드리게 했다. 당시 집결된 주민들은 모두 200여 명(전북도의회 실태조사는 100여 명)이 넘었다. 모여 있던 주민들 중 군인들이 긴 칼로 군인가족이라고 애원하는 전효녀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으며 4살 된 아이의 목을 자르는 것도 목격되었다. 토벌대는 칼로 계속 주민들을 내리쳤고 얼마 후 총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산 사람은 명당을 쓴 사람이니 일어서면 살려 주겠다’라고 했다. 살아있던 몇 사람이 일어나자 다시 총을 쏴 일어섰던 사람들이 다시 쓰러졌다. 이 날 희생당한 주민은 택동마을 주민들과 이리로 피난 온 공음면 두암리, 구암리, 석교리 주민 100여 명이었다.

 

고창지역에서 11사단이 저지른 대량 학살은 3월 13일 이후 중단되었으나 개별인 피해는 3월 18일까지 있었다. 3월 14일 심원면 주산리 이규련이 토벌군경을 피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으며, 3월 18일에는 심원면 월산리 김동반이 좌치나루 부근에서 군경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같은 시기에 심원지서는 1951년 5월 중순 심원면 월산리 손연수 등 청년 4명을 연행하여 조사한 후 고창경찰서로 이송했다고 하나 이후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다.

3월 4일에는 해리지서 동호출장소가 유치장으로 사용하던 삼양사 소금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 9명이 동호리 ‘갯무탱이’에서 살해당했다. 3월 9일에는 만돌리 김영일이 동호출장소에 연행된 후 신동호에서 희생되었다. 3월 21일에는 해리면 사반리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 6명이 경찰에 붙잡혀 연행 중 방축리 ‘멍구잔등’에서 살해되었다.

 

<8사단 사건>

 

고창지역에서는 1951년 4월 국군 11사단의 뒤를 이어 국군 8사단이 토벌작전을 계속하면서 주민들의 피해가 이어졌다. 5월 10일 아침 무장면 월림리 죽림마을에 직접 국군 8사단의 지휘를 받던 18전투경찰대대 3중대가 마을을 에워싸고 아침을 짓는 부녀자로부터 들에서 못자리 하는 사람까지 모두 89명을 붙들고 가 무장면 도곡리 시목동 옆 계곡과 봉암산 계곡에서 무차별 학살했다.

 

이상 고창지역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사건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6.~20.

고수면 지수재고랑

고창경찰서

인공

1950. 9. 28.

성산

70~120

고창내무서

토벌

1950. 10.~12.

만돌리 해변 등

200~600

11사단

토벌

1951. 1. 5.

선동리 옥산저수지 등

400~500

11사단

부역

1951. 1.

모양성 공동묘지 등

고창경찰서

토벌

1951. 3. 10.

사등천변 등

100

11사단

토벌

1951. 5.

무장면 시목동계곡 등

89

8사단,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