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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고흥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1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577

<전쟁 전 토벌 피해>

 

고흥에서는 여순사건 직후부터 고흥경찰서 경비계 소속 경찰토벌대가 팔영산 토벌작전을 벌였다. 마산 15연대는 고흥군 남양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수도경찰대도 대부분의 마을에 진입했었다고 한다. 당시 12연대 부연대장이었던 백씨(백인엽, 당시 소령)는 “당시 지휘․명령체계에서 12연대는 2여단 소속으로 원용덕 2여단장 지휘를 받았으나, 전투 경험이 있는 5여단장 김백일의 명령이 더 중요했으며, 광주에서 백선엽, 김백일이 광주에 파견된 미 임시군사고문관 브라운 소령과 협의해 진압작전 수립했다고 한다. 육군본부가 광주로 갔고, 이리에 있는 3연대, 12연대, 마산에 있는 15연대, 그리고 6연대가 동원됐는데, 실제로 동원시킨 건 3연대, 12연대였고 예비로 나머지 부대를 동원했다. 우리 부대가 먼저 광주 도착. 광주에서 명령을 받고 왔는데,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튿날 아침에 공격 명령을 받았다. 공격 명령은 김백일 장군한테서 받았다. 순천에서 반군과 좌익 관련자는 여단 헌병들이 연행했으며, 민간인은 경찰로 보냈다. 여단에서 헌병 1개 소대 병력을 파병했다. 여순사건 진압 당시 계엄령 선포와 관련된 문서는 없었고, 방송도 못 들었다. 광주에서 여단장을 만나 계엄령 선포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소집되어 고흥경찰서 유치장과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19일에서 7월 22일 고흥읍 봉북재 야산, 포두면 골짜기, 풍양면 벼락산 등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도양지서 근무자였던 김씨(김재남)에 따르면, 이후 고흥경찰서는 도양면 녹동항을 통해 배를 이용하여 후퇴했는데, 당시 사찰계장으로부터 도양지서에 구금되었던 병원 원장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살려주었다고 한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고흥의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했는데, 1950년 9월 29일 고흥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소록도병원 근무자 등 10여 명이 내무서 지하실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인민군 점령기 한센인 출신 원생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는데, 대부분이 이북출신이었던 병원직원들과 갈등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고흥이 수복되자 고흥경찰서는 낮에 마을에 들어가 주거하던 주민 중 없어진 사람이 있는지 조사를 했으며 부역혐의를 받고 있던 주민들이 있을 경우 이를 연행하여 조사했다. 연행은 경비계가 주로 담당했으며 사찰계는 조사를 담당했다. 고흥경찰서는 연행된 주민 중 A급 부역자로 판단한 주민을 쓰리쿼터에 20여 명씩 싣고 나가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또는 봉북재), 포두면 장수리 저수지, 동강면 한천교 다리밑 등에서 총살했다.

 

고흥경찰서 외에 산하 동강지서에서도 연행된 주민이 총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좌익활동을 하던 이제휴가 사촌 동생인 이승식의 집에서 밥을 먹고 갔다는 이유로 이승식이 1951년 4월 7일 동강지서로 연행되어 지서부근에서 사살되었다.

고흥 점암면에서는 뒤늦은 시기인 1952년 8월 22일 점암면 장충래와 김복술 등 주민들이 경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여순사건

보도연맹

1950. 7. 19.~22.

봉북재 야산 등

고흥경찰서

인공

1950. 9. 29.

고흥내무서 지하실

10

고흥내무서

부역

1950.10.~1951.4.

오리정 등

고흥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