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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정읍지역사건 종합

2013.07.23 23:01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779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정읍에서 소집된 주민들이 1950년 7월 초순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구슬재에서 살해당했다. 한편 입암면 등천리 군룡마을 주민들은 정읍경찰서에 보름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와 2~3일 동안 집에 있었는데 1950년 7월 21일 새벽에 철모를 쓴 경찰(혹은 군인)이 동네 사람들을 마을 어귀에 모이라고 한 다음 주민 10명을 분리하여 약 2km 떨어진 원등마을 뒤 비로골짜기로 데리고 가 총살했다.

인민군은 7월 20일 김제와 정읍 사이가 거의 개방되었으므로 저항 없이 태인에 진입했으며, 7월 21일 정읍을 공격하였다. 이에 해병대 3중대는 목포로 후퇴하였다. 7월 22일에는 정읍과 고부 저지선이 붕괴하여 고창으로 후퇴하였으며, 23일 장성, 광주의 경찰은 화순방면으로 후퇴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점령 후 이들이 후퇴하던 시기 정읍의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했다. 1950년 9월 28일 정읍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는데, 당시 300여 명이 희생당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토벌 피해>

 

정읍의 수복 과정에는 11사단이 주둔하지 않았으므로 주민피해 대부분은 정읍경찰서와 각 지서의 부역혐의자처리와 토벌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토벌경찰은 1951년 1월 27일 새벽 입암리 정해마을 주민들을 교암국민학교에 집결시켜 이중 17명을 석고촌 인근 계곡에서 총살했으며, 이어 이웃 전지마을을 수색하던 중 청년 3명을 현장에서 총살했다. 이틀 뒤인 1월 29일에는 석산마을에 진입하여 소집에 늦게 나온 주민 2명을 주민들 보는 앞에서 사살했으며, 이어 10명을 부역혐의로 연행하여 총살했다.

 

1950년 11월 소성지서에 잡혀있던 만수리 신복균 등 주민들이 인근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소방지서 업무를 보조하던 청년방위대원 노씨는 잡혀 온 부역 주민들을 저녁에 지서 부근 야산에서 총살했는데 초기에는 10여 명을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전체 희생자 수나 희생당한 다른 주민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애당리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김보현의 동생 김석현은 국군 수복 후 도피하다가 체포되어 정읍경찰서에 감금되었다.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옹동면 주민들이 9·28 수복 후부터 1951년 4월경까지 옹동지서에 의해 희생되었다. 한용수 등 6명은 1950년 12월 27일 해질 무렵 옹동면 산성리 우동마을에서 치안대원들에게 끌려가 치안대에 구금되어 있다가 실종되어 2-3개월이 지나서 치안대 인근에서 총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51년 1월 9일에는 산성리 삼리마을 이장 집에서 백 순경과 술을 먹던 중 채영달이 다른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으며, 최성대는 1951년 3월 마을에서 옹동지서 백 순경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옹동지서에 근무하던 백순경의 악명이 높았다. 그는 대낮에 동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거나 밤중에 술을 먹고 만취상태에서 매정리 정동마을 치안대 건물에 잡혀 있던 주민들에게 난사해 15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옹동지서를 돕던 청년방위대원 박씨는 치안대로 활동하면서 백 순경의 지시로 15구가 넘는 시신을 직접 매장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한편, 치안대원 왕씨에 따르면 백순경이 지서에서 풀려나오기로 되어 있던 10여 명의 청년들을 정동마을 치안대 사무실에서 사살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51년 2월 18일에는 철로변인 입암면 신면리 주민 김영출과 김위도 부자가 철도경찰에게 끌려가 희생당했다. 부자는 집에서 가마니를 짜던 중이었고 군령지로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11사단 사건>

 

정읍의 주민들은 경찰의 토벌작전 외에 11사단 토벌작전의 피해도 입었다. 11사단의 토벌작전이 있던 임실, 순창과 접경지역인 회문산 자락 마을에서도 이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 1951년 2월 20일 임실방면에서 온 11사단 13연대 1대대 군인들이 회문산 자락에 있는 산내면 종성리 마을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당시 11사단은 14세 이상 50세 이하의 주민 60여 명을 30분 간격으로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소각했으며 자신들의 짐을 나르던 주민들도 학살했다. 「전북도의회 보고서」(1994)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유동섭 등 51명이 군경에게 희생되었다.

 

이상 정읍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초~21.

조동리 구슬재 등

경찰 등

인공

1950. 9. 28.

정읍내무서

정읍내무서

부역

1950. 11.

소성면

소성지서

부역

1950.10.~1951.4.

옹동면

옹동지서

토벌

1951. 1. 27.~29.

석고촌 계곡 등

30

토벌경찰

토벌

1951. 2. 20.

산내면 종성리

60

11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