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리지역에서는 임정한의 지도 아래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5년 10월 19일 이리에 진주한 미군의 탄압을 받고 세력을 상실했다. 미군은 11월 6일 이리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미군폭격 피해>

 

전쟁 발발 후 이리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민간인희생사건은 미군의 이리역 폭격사건이었다.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3시 30분 사이 전라북도 이리시 철인동에 있는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인근, 만경강 철교 등에 미 극동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여 이리역 근무자, 이리역 이용자, 이리역과 변전소 인근 거주민 등 91명 이상을 살해했다.

호남지역은 1950년 7월 5일 이후 미 24사단이 대전, 옥천과 영동으로 후퇴함에 따라 방어선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고, 국군은 7월 8일 5사단과 7사단을 새로 편성했으나 대부분 신병인데다가 개인 화기도 없는 상태였으므로 전투를 치르지 못하고 부산으로 후퇴해야 했다. 7월 8일 천안이 점령당했으며, 이 지역을 방어하던 미 24사단은 7월 11일 금강 이남인 공주로 후퇴했다.

이리역이 폭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극동군 사령관은 2대의 비행기를 이리에 급파해 조사했다며, 7월 12일 조사결과 “아군 비행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북한비행기”일 가능성이 있다며 주한미군사령관 등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목격자에 의하면 7월 15일에도 미 전투기 4대가 이리 상공에 나타나 40여 분 동안 철도와 만경강 철교를 공격했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전쟁 발발 초기에는 인민군과 국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미 전투기가 폭격한 사건이 많았는데, 평택역이 폭격당한 사건 후인 7월 5일부터 아군 표식으로 하얀 천막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7월 11일에는 다시 이리역이 전략폭격기인 B-29에 의해 폭격 당했으며, 7월 20일에는 김제역이 폭격당한 사건이 확인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이리역이 폭격을 당하던 때를 전후하여 이리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도 희생되었다. 당시 이리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320여 명이 희생되었다. 70여 명은 7월 9일, 80여 명은 7월 13일 완주군 화산면 와룡리 새터마을에서 희생되었으며, 7월 16일에는 70여 명이 정읍 내장산 골짜기 등에서 희생당했다.

이리, 군산지역에서는 7월 16일부터 19일까지 국군과 미군이 주둔했는데, 미군은 7월 16일 철수했으며, 국군 7사단은 비무장 상태였으므로 진주로 이동했다. 남은 국군은 기간 장병 300여 명이었다. 7월 17일 강경이 점령당하면서 해병대가 소규모 전투를 치른 것 외에 다른 전투는 없었다. 18일에는 해병대가 웅포나루에 집결한 인민군과 교전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곧 철수했다. 19일 이리가 점령당했으며, 인민군이 군산에 상륙하자 국군은 목포로 후퇴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지역 주민들의 희생사건은 인민군 후퇴기에도 발생했다. 익산에서는 낭산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6명이 1950년 9월 28일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이후 미군에 의해 9월 29일 수복되었는데, 황화면 봉동리 주민 김기창, 김기화가 부역혐의로 희생되었으나 구체적인 희생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 익산(이리)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폭격

1950. 7. 11.

이리역

91

미군

보도연맹

1950. 7. 9.~16.

와룡리 새터마을 등

220

이리경찰서

인공

1950. 9. 28.

방공호

6

낭산분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