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순창지역사건 종합

2013.07.16 10:2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865

<전쟁 전 정치적 학살>

 

산악지역이 많았던 순창에서는 전쟁 전인 1949년 10월 13일경 순창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순창읍 순화리 주민 10여 명이 팔덕면 덕천리 히여태재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순창경찰서 사찰계 근무자 김씨(김종훈)는 전쟁 전 관할 내 한 마을 주민 30여 명이 좌익 활동을 이유로 몰살당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인 1950년 9월 28일 순창에서는 구림면 주민 30여 명이 운남리 곡식창고로 소집당한 후 운남리 방화천변에서 학살당했다. 같은 날 미 25사단이 순창으로 진입하였으며 10월 1일 일시적이나마 순창경찰서가 복구되었다.

 

<11사단 사건>

 

순창경찰서가 복구된 후 10월 한달 동안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은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이는 경찰조직이나 민간치안조직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것이 주원인으로 보인다. 순창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11사단이 진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1사단 20연대 1대대는 1950년 11월 6일 순창지구에 집결했으며, 12월 6일 2중대가 순창군 동계면 송치리에서 작전을 했고 3중대는 구림면 임산리에서 작전을 했다. 1951년 2월 9일 1대대와 2대대는 회문산 장군봉에 집결했다. 이 작전에는 무스탕기의 지원이 있었다. 국군은 이 작전에서 적 2천명을 사살했고, 25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전북 도의회 보고서』(1994) 186~192쪽에는 군경에 의해 희생된 숫자가 206명이며, 국채환 등 176명의 희생자 명단이 확인되고 있다.

1950년 12월 3일 20연대는 동계면 신흥리에 진입하여 주민 9명을 살해했으며, 이어 동계면 주월리에 진입하여 주민 14세 이하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15세 이상 50세 이하의 주민을 남녀 구별 없이 마을회관 앞에 세워놓고 몽둥이와 칼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10여 명이 희생되었다.(「전북 도의회 보고서』, 1994)

12월 16일 순창읍 백산리에 진입한 국군은 박재일 등 20여 명의 주민들을 순창읍 ‘대동산 아래 하천변’에서 집단학살했다.(2008하반기 3권 185쪽) 같은 날 김진봉·김진섭 형제 등 풍산면 유정리 순정마을 주민 12명도 순창읍 ‘대동산 아래 하천변’에서 11사단 군인들에 의해 집단희생되었다.

12월 27일에는 순화리 박춘근 등 10여명이 충신마을 충신당 막골너머재에서 희생되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순창경찰서 경찰 조씨(조선결)는 빨치산을 공개처형한 것이라며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51년 1월 26일에는 복흥면 답동리 신기마을 주민 50여 명이 천지재에서 11사단에게 희생되었다.(『전북 도의회 보고서』(1994) 164쪽과 165쪽)

1951년 2월 18일 순창경찰서와 인계국민학교에 갇혀 있던 조순익 등 주민 30여 명이 팔덕면 청계리 숯거리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1951년 3월 23일 쌍치면 종곡리 송춘화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마을에서 불에 타 희생되었다. 1951년 3월 27일 쌍치면 종곡리와 신성리 주민 20여 명이 국군에 의해 신성마을 뒷산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전북 도의회 보고서』(1994)에 따르면 순창지역에서 11사단에 의한 피해가 664명, 경찰에 의한 피해가 95명이었다고 한다.

 

<8사단 사건>

 

순창지역에서는 11사단에 이어 이와 임무를 교대한 8사단도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1951년 4월 24일 국군 8사단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 쌍치면 옥산리 마을로 들어오자 주민들은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병약자를 집에 둔 채,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옥산리에 거주하던 정씨는 79세의 고령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서 있던 중 토벌군인이 쏜 총에 사망했다. 희생자는 배에 총상을 당해 마당에서 엎어진 채 발견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사료』58권의 국군 8사단 「전투상보」에 따르면, 1951년 4월 6일 국군 11사단과 교체된 8사단이 1951년 4월 20일과 21일 순창군 쌍치면에서 소탕작전을 전개했음이 확인된다. 정씨 외에 김식두도 희생되었다고 한다.

 

018.jpg 

(아들 김씨가 희생자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2010년 9월 2일 조사.)

 

4월 13일에는 쌍치면 금성리 주민 30여 명이 토벌 국군에 의해 오봉리 곡골에서 희생되었으며, 4월 20일에는 쌍치면 용전리 묵산마을 주민 20여 명이 토벌 국군에 연행된 후 실종되었다. 4월 26일에는 쌍치면 탕곡리 최영진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마을에서 희생되다. 5월 13일에는 순창 쌍치면 탕곡리 김석봉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방산리 뒷산 두들재에서 희생되었다. 5월 23일에는 쌍치면 용전리 손수만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국군에게 연행된 후 실종되었다.

8월 13일에는 빨치산의 은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국군이 만일사(萬日寺) 법당을 불태우자 법당을 지키려던 주지의 백모도 법당과 함께 불에 타 사망했다. 『전북 도의회 보고서』(1994) 157쪽에 따르면, 이 시기에 황정국 등 29명이 아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상 순창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10. 13.

팔덕면 히여태재

10

순창경찰서

인공

1950. 9. 28.

운남리 방화천변

30

토벌

1950.11.~1951.4.

순창읍, 동계면 등

800

11사단

토벌

1951. 4.~8.

쌍치면 옥산리 등

120

8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