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무주지역사건 종합

2013.07.11 12:49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620

<전쟁 전>

 

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무주군은 전쟁 전부터 빨치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1949년 군경합동 토벌대가 덕유산 토옥동 골짜기를 중심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했는데, 1949년 10월에는 국군 5사단 3연대 소속 홍성준 독립부대를 안성면에 주둔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 발발 후 패전한 미군은 경부철로를 따라 영동지역을 통해 후퇴했으므로 무주지역에는 국군이나 미군이 없었다.

무주에서는 전북도경의 명령에 의해 무주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이 1950년 7월 17일 전북도경과 CIC의 지시를 받은 무주경찰서(서장 허재청 경감)에 의해 무주읍 당산리 으름숯골과 무주읍 오산리 밤숯골 금구덩이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무주군수 등 행정관청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벌어지던 7월 17일 피난을 먼저 떠났으며, 무주경찰서는 사건 후인 7월 20일 무주를 떠났다. 이들이 떠난 후 이현상부대가 7월 23일 무주에 들어왔으며, 인민군 4사단이 다음 날 무주읍에 진입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 점령기 무주지역의 주민 피해는 미군의 폭격과 후퇴하던 인민군의 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1950년 7월 25일 오후 6시 미 전술항공통제센터(mellow)로부터 표적정보를 받은 미 49폭격전대 8폭격대대 전투기 2대가 무주군 읍내리 하천 옆 큰 버드나무 밑에 숨어 있던 주민들을 기총사격하여 6~7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9월 26일에는 후퇴하던 인민군 측 내무서원 등이 무주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50여 명을 무주읍 용포리 하늘바위에서 살해했다. 이 사건에서 14~15명이 생존했다고 한다.

 

<11사단 사건 등>

 

산악지역인 무주 역시 국군 11사단과 8사단의 토벌작전이 있었으므로 이로 인한 피해가 대부분이었고, 부역혐의사건에 의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10월 20일 안성면 장기리 마을에 진입한 11사단 군인들이 주민들을 집결시켜 담배창고에 가두었다. 이중 유영대 등 일부 주민들은 남원으로 이송되었으며 박성여, 전씨 등은 석방되었다가 같은 날 죽천리 죽장마을 앞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4~5명이었다.

 

1951년 11월 18일에는 토벌작전 중이던 5(?)사단 군인들에 의해 설천면 심곡리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이날 군인들이 설천면 심곡리에 군인들이 진입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정갑, 무주군당이 있었다는 집의 주인 김수근을 총살했다. 같은 날 인근 배방리를 포함하여 모두 80여 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이상 무주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7.

당산리 으름숯골 등

300

무주경찰서

폭격

1950. 7. 25.

읍내리 하천

6~7

미군

인공

1950. 9. 26.

용포리 하늘바위

50

무주내무서

토벌

1950. 10. 20.

죽천리 앞산

6~7

11사단

토벌

1951. 11. 18.

설천면

80

8(또는 5)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