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남원지역사건 종합

2013.07.09 15:40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988

<전쟁 전 정치적 학살>

 

해방직후 남원지역에는 남원인민위원회와 건국군(국군준비대)이 활동했다.

이들은 1945년 11월 15일 미 전술부대와 충돌했는데,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이 사건이 국방경비대 창설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남원지역에 미군이 도착한 때는 1945년 10월이었는데, 당시 미군은 인민위원회가 관리하고 있는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인민위원회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11월 15일 전주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부대가 남원지역의 인민위원회 간부 여러 명을 체포하여 전주로 이송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민 100여 명이 이송 차량을 가로막고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미군의 사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서장은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이 추가 파견되었고, 다음날인 16일에는 시위에 가담한 주민 16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17일 오후가 되자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남원경찰서를 포위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미군의 발포로 시위군중 2명이 사살되었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경찰관 1명도 칼에 찔려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50여 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로 인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던 당시 남원 건국군 차장이었던 이현열(李鉉烈) 판결문에서 자세히 확인된다. 당시 이현열과 함께 남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박종오도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 적혀 있는 당시 사건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11월 15일 전라북도 경찰부장 김응조 등 경찰은 남원군청과 면사무소를 장악하고 있는 인민위원회를 공격하여 김창한 등 강부 5명을 체포하여 전주를 향했다. 그런데 사매면에서 건국군 훈련을 시찰 중이던 이현열은 이 소식을 듣고 진정현 등 4명, 건국군 훈련소 대원 12명과 함께 화물자동차를 타고 남원읍으로 가던 중 오후 5시 30분 남원군 왕치면 갈치리 율치에서 전주로 가던 김응조가 탄 승용차를 만나게 되었다.

건국군 대원들은 승용차를 포위한 후 이현열은 차 안에 있던 김응조에게 “오늘 검거한 남원인민위원회 간부를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차안에 있던 김응조와 수행원 순사부장 김봉조는 위협을 느끼고 권총을 꺼내들자 건국군 대원들이 “권총을 놓아라”고 고함을 쳤고 사태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김봉조가 권총을 내려놓게 되었다.

권총을 빼앗은 이현열 등은 김응조에게 인민위원회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던 중 6시 위 박종오가 정병용 등 20여 명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박종오는 김응조에게 “권총으로 쏠 테면 쏘아 봐라”로 큰 소리를 쳤다. 차에서 끌려나온 김응조와 김봉조는 군중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았다. 김응조는 1개월, 김봉조는 3일의 치료가 필요한 상해를 입었다.

전주지방법원은 1946년 6월 7일 이현열과 박종오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선고했다.(김응조는 1946년 2월말 불법행위 및 죄수학대로 해임되었다)

 

‘전화로 불러내어 사살, 독청간부 양남식씨 피살’

전화로 불러내어 사살

독청간부 양남식씨 피살

[남원지국특전] 대한독촉남원 청년연맹총무부장 양남식(25)씨는 지난 4월 28일 6시경 전화로 괴한에게 유인되어 금암봉 후 록에서 권총과 일본도로 난사를 당하여 마침내 절명하였다. 이에 급보를 접한 경찰당국에서는 유력한 단서를 얻어 범인체포에 맹활동중이든 바 지난 3일 진범 이모를 전주에서 체포한 동시에 그 뒤 주천면에서 공범 2명도 무난히 검거하였는데, 이들은 이 외에도 현지경찰서장을 비롯하여 독촉간부 등 7명을 모조리 피살하려는 어마어마한 흉계를 품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고 양남식씨의 군만장은 4월 30일 하오 1시 군미학교 교정에서 전북 일부 14군의 독촉대표와 청년연맹대표를 비롯하여 수만 군민의 참여 아래 장엄하게 집행되었는데 군민의 총의로서 고 양씨에게 의사호를 칭호하기로 되었다.(동아일보, 1947년 5월 13일)

 

<전쟁 전 토벌작전 피해>

 

남원에서는 전쟁 발발 전부터 국군 토벌작전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전북지역을 담당했던 향토사단은 국군 5사단(사단장 백선엽)이었다. 1949년 7월 20일 국군 5사단 3연대 2개 중대가 산내면 내평리, 덕동리 주민 13명을 덕동초등학교 뒷산 달음재에서 학살했다. 1949년 10월 18일에는 국군이 주천면 고기리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이중 청년 35명을 끌고 가 27명을 총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남원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로 소집‧연행당했으며, 이중 100여 명이 1950년 7월 20일경 국군 5사단 헌병대에 의해 고죽동 황죽마을 야산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점령기에는 그들의 후퇴시기에 해당하는 1950년 9월 26일과 9월 27일 미군과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26일에는 추석을 맞아 한 집에 모여 있던 사매면 오신리 마을 주민 8명이 미 전투기 4대의 기총사격과 이에 이은 폭격으로 모두 사망했다. 다음 날 남원내무서에 감금되었던 경찰관 및 우익인사 30여 명이 후퇴하던 남원정치보위부장의 의뢰에 의해 노암동 어은골 공동묘지에서 총살당했다.

 

<11사단 사건>

 

남원지역은 미군에 의해 수복되었으며 1950년 10월 수복한 경찰에 의한 대규모 부역혐의사건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기간 동안 경찰조직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피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국군 11사단이 호남지역의 토벌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1950년 11월 남원지역에 11사단이 배치되면서 대강면 강석리, 주천면 고기리 덕치리, 산내면 백일리에서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되었다. 위 4개리에서만 확인되는 희생자가 150여 명에 달한다.

 

1950년 11월 17일(전북도의회는 11월 29일) 대강면 강석마을 주민 90여 명이 4개 장소에서 집단살해당했다.

11월 17일 새벽 남원에 주둔해 있던 11사단 500여 명(1개 대대 병력)이 그럭재를 넘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강석마을을 점령했다. 이들은 5백여 명의 주민들을 마을 앞 어귀 논바닥에 집합시키고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주민들을 분류하였고 이 중 90여 명을 일본도와 소총으로 무참히 살해했다. 희생자들 중에는 50~60세 된 노약자 19명이 있었으며 한명 씩 끌고 나가 일본도로 목을 내리쳤다. 주민들이 살던 집은 모두 소각했다.

주민들은 이 국군을 11사단 205부대로 알고 있었으며 국군토벌부대가 전날 밤 많은 총소리를 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학살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주민 김점동은 한 장교가 일본도로 세 번이나 내리쳐 목이 절반 가까이 잘렸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사료』 60권 296쪽에 11사단 전차공격대대가 1950년 11월 16일 (남원) 금지면 방면으로 출동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이 사건의 가해자로 판단된다. 11사단에 전차공격대대라는 명칭의 부대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950년 11월 20일(전북도의회는 11월 19일)에 11사단 국군이 총을 쏘며 주천면 고기리 마을에 진입하였다.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이 집에 있는 채 희생당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 30여 명이 마을 앞 어귀로 끌려나와 희생당했고 300여 채의 가옥이 소각되었다. 희생자 중 17명의 명단이 「전북도의회 보고서」(1994)에서 확인된다.

 

1950년 12월 19일에는 산내면 백일리에 진입한 국군은 마을 주민들을 향해 “손 들어”라고 했으나 청각장애를 갖고 있어 이를 알아듣지 못했던 김동일이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1950년 12월 29일(전북도의회) 30여 명의 주천면 덕치리 주민들이 11사단과 남원경찰서로 구성된 군경토벌대에게 희생당했다. 28명의 희생자 명단이 「전북도의회 보고서」(1994)에서 확인된다.

 

<부역혐의 피해>

 

남원지역 경찰에 의한 부역혐의사건은 11사단의 토벌작전이 끝난 뒤 발생했다.

남원경찰서는 1951년 3월 9일 좌익혐의자의 가족이라며 20여 명의 주민을 남원 산동면 대상마을 한재골 뽕나무 밭에서 집단학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이중 2명의 신원을 밝혔다.

남원군 남원읍 동충리에 살던 이병용(당시 32세)은 그 형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산동면 대기리에 살던 이명수(당시 36세)는 그 동생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되어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중 1951년 3월 9일 산동면 대상리 대상마을에서 학살당했다.

이른 새벽 남원읍에서 산동면 방향으로 경찰로 생각되는 자들이 트럭에 민간인들을 싣고 와 산동면사무소를 지나는데, 트럭에 실려 가고 있던 이명수가 “날 죽일라고 그라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에 이들은 대상마을 한재골 뽕나무 밭에서 모두 학살당했다.

 

이상 남원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5. 11. 15.

남원경찰서

2

미군

전쟁 전

1949. 7. 20.

달음재

13

5사단

전쟁 전

1949. 10. 18.

27

5사단

보도연맹

1950. 7. 20.

고죽동 황죽마을

100

5사단

폭격

1950. 9. 26.

사매면 오신리

8

미군

인공

1950. 9. 27.

어은골 공동묘지

30

남원내무서

토벌

1950. 11. 17.

대강면 강석리

90

11사단

토벌

1950. 11. 20.

주천면 고기리

30

11사단

토벌

1950. 12. 19.

산내면 백일리

1

11사단

토벌

1950. 12. 29.

주천면 덕치리

30

11사단

부역

1951. 3. 9.

산동면 한재골

20

남원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