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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해남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4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2113

<전쟁 전 피해>

 

해남에서는 1946년 9월 9일 조선공산당원 해암 김해일이 경찰에게 사살당했으며, 1946년 11월 11일에는 추수봉기가 있었다. 얼마 뒤 11월 17일 충남경찰부대가 추수봉기 가담자를 검거하기 위해 해남군 화산면 용덕리에 진입하였다. 충남부대는 마을을 뒤져 주민들을 끌어내 폭동 가담여부를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 2명이 사망했다. 같은 시기 계곡면 주민 오창기 등 3명도 추수봉기를 주도한 혐의를 받아 피신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해남 추수봉기에 참여했던 계곡면 법곡리 오종대는 1947년 초 경찰에 연행되어 총살당했고 오종오는 1947년 5월 3일 잠을 자던 중 오종권과 함께 연행되어 마을 옆 청룡잿등에서 총살당했다. 1948년 4월 20일에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 해남군 북평면 달마산에서 피신하던 북평면 서흥리 나종현이 현산면 고현리 뒷산에서 현산지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1949년 4월 해남지역에서도 토벌작전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남에서는 1949년 4월 12일 해남읍, 현산면 화산면 삼산면 주민 80여 명이 해남 경찰토벌대에게 잡혀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에서 희생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해남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 또는 연행당하여 해남경찰서와 해남식량영단 창고(혹은 공회당) 등에 감금되었다. 7월 16일 해남경찰서는 이들을 어란항에서 끌고 나가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서 살해했다. 한편 또 다른 주민들은 해남식량영단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7월 22일 해남군 화산면 맹원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해남 보도연맹원의 수는 600여명에 이르렀다. 사건 당시 의용소방대원이었던 김씨(김인택)의 증언에 따르면, 갈매기섬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주로 송지면, 북평면, 현산면 보도연맹원이었다. 이후 해남경찰 150여 명이 선박 1대, 경찰 가족 120명 1대(천신호), 공무원 및 우익인사 30여 명은 별도 선박을 이용하여 송지면 어란리, 완도, 욕지도, 거제도로 후퇴했다. 거제도에서 경찰은 전투부대로 출동하고, 가족 등은 다시 부산으로 후퇴했다.

 

<나주부대사건>

 

해남경찰서의 후퇴 후 나주경찰부대가 해남에 진입했다. 나주경찰서의 경찰관 270여 명은 7월 23일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후 3시 후퇴를 시작하여 영암, 강진, 장흥, 보성을 거쳐 7월 25일 해남에 진입했다. 이들은 완도를 통해 해로로 부산까지 후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해남경찰이 후퇴한 사실을 몰랐다면 인민군으로 위장한 나주부대 경찰과 해남 완도경찰 간의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므로 이 사실과 수백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희생사실을 알고 있었을 나주경찰부대가 경찰신분을 숨긴 채 해남에 들어와 인민군 행세를 하며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전날까지 후퇴하던 경찰에게 가족들을 학살당한 유족들과 주민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소집되었다. 주민들 소집이 끝나자 변복한 경찰들이 신분을 밝히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해남에서는 이런 수법에 의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해남읍 주민 40여 명이 학살당했으며 마산면 상등리에서도 15명의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 모두 60여 명이 희생되었다.

해남읍에서는 2명 이상 조를 이루어 분산한 경찰에 의해 해리에서 7명이 사살당하고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수성리에서는 6명, 구교리에서는 3명, 남동리에서 6명, 신안리 2명, 읍내리 5명, 중앙리 4명, 성내리 1명, 기타 4명 등 모두 40명이 희생되었다.

같은 날 마산면 상등리에서는 인민군으로 위장한 20여 명의 경찰관들이 마을에 진입하면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게 한 뒤 6명을 살해했다. 7월 27일까지 마을에 주둔하던 이들은 26일 6명을 병풍바위골에서, 27일 3명을 복평리 잿등에서 살해했다. 7월 25일 마산면 화내리에도 경찰부대 차량 1대가 진입하여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었으며, 여기에 소집된 주민 40여 명 중 민병남 부자 2명이 해남경찰서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같은 시기에 현산면 일평리에서도 완도읍으로 이동하던 경찰에 의해 주민 3명이 희생되었으며, 송지면 석수리에서도 2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확인한 해남의 희생자 수는 55명이다. 이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저질렀던 경찰이, 이에 대한 보복감을 갖고 있었을 주민과 유족을 의도적으로 선동하여 다시 한 번 학살하는 악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해남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9월 29일 우슬재, 금강곡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경찰토벌 피해>

 

인민군 후퇴 후 해남에 진입한 해남경찰서와 산하 각 지서는 지역 사정도 알지 못한 채 부역자 색출과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주민들 피해가 극심했다.

10월 14일 해남 계곡면 장소리 신봉만 등 주민 9명이 강진으로 가던 중 해남 계곡면과 강진군 성전면⃉경계인 연계재 경계에서 강진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명이 살아남았다.₹생존자는 희생사실을 마을에 알렸다.

해남에서는 10월 20일 해남경찰이 대한청년단, 의용소방대와 함께 산이면 상공리에 총을 쏘면서 진입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상공리 마을 주민들 일부가 이들을 피해 도망하게 되었고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상공리 오유록 등이 마을 주민 7~8명이 이웃 주민의 사랑방에 모여 있던 중 학살당했다.

해남경찰서는 연행한 해남읍 구교리 주민 80여 명을 11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 등에서 총살했다.

계곡면에서는 1950년 11월 9일부터 1951년 1월 15일까지 집단희생사건이 발생했다. ‘방춘리’는 국군 수복 직후 1950년 11월 9일경 경찰에 의해 집들이 모두 불에 태워졌다. 주민들이 거처할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1951년 1월 7일 경찰에게 20여 명의 주민들이 무이리 골짜기 등에서 희생되었다. 1950년 12월 6일 계곡지서는 갇혀 있던 장소리 해주마을 주민 10명을 성진리 월암고개에서 총살했다. 월암고개에서는 1951년 1월 10일과 15일에도 희생사건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1월 10일 사건 당시 월암고개에는 성진리 주민들을 포함하여 8명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가학리, 장소리, 여수리에서 주민들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된다.

마산지서는 자수하거나 체포된 주민 50여 명을 면소재지인 화내리 마산지서 유치장과 소방대 창고에 감금했으며 11월 7일 이중 20여 명을 화내리 두드럭재에서 총살했다. 노하리 붉은데기에서는 11월 12일 홍광표가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에 의해 37명이 희생되었으며 11월 16일에는 4명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문내면에서는 우수영지서가 12월 6일 연행한 주민들을 율돌목 야산에서 총살한 사건이 확인되었다. 당시 경찰은 구덩이를 2개 팠으며 5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해 그 자리에 매장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5일 뒤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심동리 이명준은 인민군 점령기 마을 주민들의 추천으로 리 인민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원만한 일처리로 피해 본 마을 주민들이 없었다고 한다.

북평면 남창지서는 감금했던 주민 60여 명을 집단학살했다. 평암리 김천희 등 남창지서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주민들이 10월 26일 남창리 붉은잔등 굴속에서 함께 총살되었으며, 이동호 등 용일리 청년 7~8명이 10월 31일 월송리 좌일장터 인근 새노재 다리 밑에서 함께 총살되었다. 같은 시기 김봉현 등 내동리 주민 40여 명의 좌일지서 뒤 오십이재에서 희생되었다.

산이지서는 10월 하순 부역자 처벌을 위해 지서장, 면장, 대한청년단장 등이 참여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부역혐의자들의 자수를 권유하는 한편 수시로 각 마을에 가서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였다.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은 초송리 지서 옆 창고에 갇혀 조사를 받은 후 일부는 풀려났으나 대부분은 1950년 11월 10일부터 진산리 뻔지, 금송리 국도면 대나무 숲, 두목마을 뒷산 등에서 살해되었다. 산이지서 옆에는 창고가 3개 있었고 한 곳에 5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5일 정도 갇혀 있던 주민들은 밤에 불려나간 뒤 희생당했다. 11월 11일에는 상공리 양산옥 등이 진산리 뻔지에서 총살당했으며, 12일경에는 금송리 박태길, 13일에는 상공리 김진홍, 14일에는 장태순 등 4명이 희생당했다.

이어 산이지서는 1951년 3월 다시 학살사건을 저질렀는데, 이는 1951년 2월 지서장이 최기명으로 바뀌면서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1951년 3월 14일 대진리 김택우 등이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검찰사무보고에 관한 건’에 기재되어 있으며 최기명은 이로 인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단기4284년 형합제19호」)에 따르면,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복귀한 경찰은 10월 5일 남군 북평면 남창항에 도착하였으며 6일 새벽에 해남읍을 수복하여 해남군청 군수실에서 ‘시국수습대책회의’를 열고 ‘부역자를 검거하여 죽일 때는 해남경찰서장의 승인을 얻으라’는 결정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 희생자들 대부분은 1950년 10월에 지서에 끌려갔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났던 주민들이었다.

삼산지서는 10월 28일 삼산면 안동리 김재근과 그의 둘째 딸 김일남을 안동리 망령골에서 총살했으며, 1950년 11월 11일 위 김재근의 큰 사위 문준용을 비롯한 50여 명의 주민을 삼산면 창리 남산뫼 중턱에서 총살했다. 비슷한 시기에 해남읍 금강굴에서도 희생이 있었다.

송지면 산정지서는 10월경 주민들을 산정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후 주민들에게 자수를 권유하였다. 자수한 주민들과 이후 연행된 주민들 400여 명이 산정지서 옆 5개의 창고에 분산 감금되었다. 이들은 11월 12일경 대부분 산정리 산진목, 어불도 앞바다, 치소리 쑥고개, 해원리 연골 골짜기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현산면에서는 1950년 11월과 1951년 1월 집중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 현산지서는 1950년 11월경 주민들을 일평리 현산지서 옆 창고에 감금했다가 딱골재, 배암골, 두모리 바닷가, 일평교 위 산기슭 등에서 총살했으며, 11월 5일 구산리 박진채 등 20여 명의 주민들을 월송리 딱골재에서 총살했다. 11월 7일에는 공북리 김만수 등 30여 명의 주민들을 두모리 바다에 수장했는데, 이때 고현리 윤씨 등 2명이 살아 돌아왔다. 일평리 이성준 등은 11월 15일 양곡창고 인근 소나무밭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확인된다.

화산지서는 주민들을 유치장과 해창리 창고 등에 구금했다가 해창리 나붓재와 구시리 뒷산, 정머리 뒷산, 마명리 입천골 등에서 총살했다. 평호리 송평마을 박창규 등 13명은 해창리 창고에 20여 일동안 감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6일경 해창리 나붓재에서 희생당했다. 11월 10일에는 송산리 최은상 등 30여 명이 같은 장소에서 희생당했으며, 11월 19일에는 월호리 김일이 같은 장소에서 희생당했다. 송산리 최연석은 11월 5일 현산면 구시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관동리 이동욱은 마명리 장터 원두막에 갇혀 있다가 11월 8일 석정리 검더굴 도랑에서 총살당했으며, 같은 마을 김은희는 11월 12일 정머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공북리 정래구 등은 1950년 8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이웃 고현리 주민들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그의 부친 정수복은 1951년 3월 15일 아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안평리 김병모 일가족은 3월 9일 화산면 장고개에서 희생되었다. 황산리 박옥렬은 1951년 3월 27일 고담리 성매산 방공호로 추정되는 곳에서 희생되었다. 화산면에서는 4월경에 집단학살이 한 차례 더 있었다. 월호리 김덕수(위 희생자 김일의 동생)는 1951년 4월 1일 나붓재에서 희생되었으며, 송산리 임유선 등 같은 마을 주민 10여 명은 4월 4일 마명리 검더굴에서 총살당했다. 화산면 제2대 면장이었던 이재식은 화산지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으며 경찰은 시신을 도살장 하천에 유기했다.

옥천지서는 1951년 4월 14일 마을 뒷산에서 숨어 지내던 박상귀를 잡으러 왔다가 박상기를 박상귀로 잘못 알고 연행하여 만대산 골짜기에서 총살하였다. 같은 마을 윤성하는 1950년 10월 27일 해남경찰서에 자수했으나 그날 해남읍 우슬재에서 총살되었다.

화원지서는 10월 29일 화원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화원면 매월리 김하태를 연행하여 신덕리 안골 산중턱에서 총살했다. 11월 18일 같은 마을 정문기를 같은 장소에서 총살하였고, 1951년 2월 4일 같은 마을 정문순과 위 김하태의 동생 김상태 외 3명을 마산리 고개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한편 별암리 양암국은 1951년 1월 8일 7~8명의 주민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수동리 앞바다로 끌려 나가 수장당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6. 11.~1948.

화산면 용덕리 등

8

경찰

해남추수봉기

전쟁 전

1949. 4. 12.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80

경찰토벌대

보도연맹

1950. 7. 16.~22.

진도 갈매기섬, 화산면 맹원 등

해남경찰서

소개

1950. 7. 25.~27.

해남읍, 마산 상등리

60

나주부대

인공

1950. 9. 29.

우슬재 등

해남내무서

부역

1950. 10. 14.

계곡면 연계재

8

강진경찰서

토벌

1950. 10. 20.

산이면 상공리

10

경찰토벌대

부역

1950. 11. 10.~11.

삼산면 신금리

80

해남경찰서

부역

1950.12.~1951.1.

성진리 월암고개 등

40

계곡지서

부역

1950. 11. 7.~16.

두드럭재, 붉은데기 등

60

마산지서

부역

1950. 12. 6.

율돌목 야산

50

우수영지서

부역

1950. 10. 26.~31.

붉은잔등 등

60

남창지서

부역

1950. 11. 10.~14.

진산리 뻔지 등

50

산이지서

부역

1950. 10.~11.

안동리 망령골

50

삼산지서

부역

1950.10.~1951.1.

신덕리

10

화원지서

부역

1950. 11. 12.

산정리 산진목 등

400

산정지서

부역

1950. 11. 5.~15.

월송리 딱골재 등

50

현산지서

부역

1950. 11. 6.~19.

해창리 나붓재 등

50

화산지서

부역

1951. 3. 14.

대진리 뻔지 등

산이지서

부역

1950. 3.~4.

화산면 장고개 등

20

화산지서

부역

1950. 4. 14.

만대산 골짜기 등

옥천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