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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함평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3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675

<전쟁 전 피해>

 

함평에서는 전쟁 전 경찰의 토벌적전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949년 9월 21일과 9월 22일 함평읍 진양리 신기·동하·양림·정창마을 주민 28명이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유격대에 의해 양림마을 뒤 동산 선암정과 양림마을 앞 저수지 방죽 둑 비석거리에서 집단희생당했다.

9월 21일 불갑산 공비토벌작전을 마치고 불갑면에서 함평읍으로 진입하던 경찰유격대가 양림마을에서 연행한 주민 장락규를 사살한 뒤 마을 주민 4명을 유격대 집결지인 선암정으로 끌고 와 또 사살했다. 이어 이들은 양림마을에 진입하여 청년 19명을 함평경찰서로 연행해 밤새 구타·고문했다.

다음 날인 9월 22일 다시 양림마을에 진입한 경찰유격대는 100여 명의 주민을 선암정에 소집한 뒤 신기, 동하, 양림마을 구장 등 4명을 총살하고 양림마을 가옥 7채를 방화했다. 같은 날 함평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청년 19명도 마을 앞 저수지 둑에서 총살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1949년 9월 25일자 『호남일보』는 “면서기 구장 등 가담한 함평폭도 28명 사살. (함평) 지난 20일 아침 윤상수 중대장이 인솔한 유격대와 한청배속 장교 김창성 소위가 인솔한 한청부대가 대동면과 신광면 산악에 적을 색출 또는 잠복근무를 마치고 21일 오후 5시 반경에 신광면으로부터 귀환 도중 읍으로부터 4킬로미터 지점인 함평군 양림부락 뒷산에서 도주하는 폭도를 발견하고 즉시 하차하여 부락을 포위하고 사살 28명, 아지트 7개, 미신기 1대, 침구 등을 압수한 전과를 올림. 경찰 측은 최판기 순경이 적개심에 불타는 피 끓는 용기로 적진에 돌진하여 수명을 발사 즉사케 하다가 불행히도 흉탄에 우측 흉부에 부상을 입음”이라고 보도하였다. 한편, 마을 주민들은 “공비토벌의 전과를 올리기 위해 꾸며낸 내용이다”라고 주장한다.(과제 : 1949년 9월 불갑산 빨치산 활동 현황, 불갑산 토벌작전 현황)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함평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어 함평여중(현재의 함평교육청 자리) 강당에 감금되었다. 이중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주민들은 7월 13일 목포시 인근 바다(신안군 비금면 인근 바다)에서 전남도경찰국 경비선 배에서 실려 총살당했다. 나머지 주민들은 7월 21일 학교면 죽정리와 고막리 사이 얼음재에서, 7월 23일에는 나산면 구산리와 대동면 강운리 사이 넙태에서 저질러졌다. 희생지가 각각 달랐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보도연맹원 갑종은 목포, 을종은 얼음재, 병종은 넙태에서 희생된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 함평여중 강당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은 트럭 12대에 실려 끌려갔는데, 한 사람씩 뒤로 손을 묶고 이를 다시 3명씩 연결시켰다. 트럭에는 3~4명의 경찰이 함께 탔다. 경찰은 넙태에 차량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사살했는데 3명씩 앞으로 걷게 한 후 뒤에서 총을 쐈다. 함평여중 강당에 소집된 보도연맹원은 222명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인원점검을 했는데 생존자 노기현은 맨 끝번인 222번이라서 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감금되어 있던 중 나산면 주민 3명이 석방되었으므로 남은 주민 219명이 나산면 넙태로 끌려간 것이었다. 219명 중 노기현을 포함하여 정만우, 김정수처럼 총상만 입은 생존자가 몇 명 더 있었다고 한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 점령기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함평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50년 8월 6일 오전 10시 정찰기의 정찰 후 나타난 2대의 전투기가 신광면 장터의 주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한 후 되돌아와 폭탄을 떨어뜨렸다. 2명의 피해사실 외에 더 이상 확인된 바는 없다.

 

<11사단 사건>

 

함평지역에서는 인민군 후퇴시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사건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인민군이 후퇴한 직후 11사단이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한 10월 22일까지 심각한 주민피해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와 3대대는 1950년 10월 22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광산군 본량면, 장성군 삼서면 인근에서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11사단은 10월 22일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율동마을 주민 윤재형 등 8명을 살해했으며, 이어 낙천마을 주민 7명, 월산리 주민 7명, 대동면 향교리 주민 5명, 대동면 명교리 주민 7명을 살해했다. 이날 모두 34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10월 23일에는 함평읍 수호리 대등마을, 해동마을 주민 이병범 등 16명이 희생당했다. 10월 24일일에는 대동면 덕산리 김재운이 희생당했다. 10월 28일에는 나산면 월봉리 주민 곽원길 등 8명이 희생당했다.

11월 27일에는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 주민 오봉근 등 7명이 모여서 노루고기를 삶아먹던 중 월야면 외치리 2대대 5중대 초소로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12월 2일 2대대 5중대 군인이 해보면 문장리에서 젊은 여자를 욕보이려 하자 같은 마을 김태식이 이를 막았다. 그러자 군인이 주민을 끌고 가 들판에서 가슴에 총을 쏴 사살했다. 이런 일은 12월 25일에도 있었다. 군인들은 젊은 여자를 끌고 가면서 주민 2명을 살해했다. 끌려간 여성들은 다음 날 돌아왔다. 당시 군인들이 젊은 여성들을 끌고 가 욕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막던 주민들이 사살당한 것이었다.

12월 6일 월야면 정산리에 들이닥친 5중대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장교마을 9명, 동촌마을 11명, 서촌마을 2명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이어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로 가서 여자와 노인들에게 해보면 문장으로 소개가라고 했고 이어 남은 20대에서 40대 사이의 남자들 12명을 학살했다.

다음날인 12월 7일 5중대는 월야면 월야리에 진입하여 주민 400여 명을 남산뫼로 몰았다. 이곳에서 군인들은 17~45세 주민들을 분류하여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군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려주겠다고 말했고 이 말을 믿고 일어 난 주민들을 다시 사격했다. 군인들은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가 불을 끄라고 한 뒤 마을로 내려가던 생존자 뒤에서 사격했다. 이렇게 85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12월 9일 5중대는 이장을 앞세우고 월야면 외치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몰아내 20여 명을 중대본부가 있던 해보면 금덕리로 끌고 가 두루샘 부근에서 학살했다. 같은 날 군인들이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이문초등학교에 모았으며 선별된 10여 명의 주민들이 학교 옆 나산천변에서 학살당했다.

12월 23일 해보면 문장리에 주둔하던 5중대가 해보면 상곡리 상모마을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모았다. 군인들은 주민들 중 윤자일 등 청년 3, 4명을 연행하였고, 그 뒤 연행된 청년들 모두 실종되었다.

12월 31일 5중대는 해보면 대창리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붙이면서 주민들을 해보중앙초등학교 인근 쌍구룡으로 집결시켰다. 이 중 남자들을 학교 옆 길가에 앉혀 놓고 기관총을 쏘아 학살했다. 이어 남은 여자들을 학살했다. 모두 23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12월 말 5중대는 나산면 초포리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박성인의 목을 쏴 사살하였다.

1951년 1월 12일 5중대는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주민 50여 명을 학살하였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살려면 쌍구룡쪽으로 나오라”고 소치쳤으며 이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을 쏘았다고 한다.

1951년 1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집결시킨 후 무차별 사격을 가해 20여 명을 학살했다. 우치리 청년들은 이미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모두 피신했으며, 이 날 희생자는 대부분 피신을 못한 어린이와 노약자들이었다.

1951년 초 20연대가 대동면 백호리 석호마을에 진입하였다. 이외에도 희생된 주민들이 많았다.

 

<경찰토벌 피해>

 

함평에서는 국군 외에 경찰의 토벌작전에 의한 피해도 심각했다. 1950년 10월 국군 11사단 20연대 3대대의 토벌작전 이후 1951년 2월 19일 군유산작전 때까지 월야․해보․나산면 등 동부 3면을 제외한 함평지역의 치안을 경찰이 전담하였다. 1950년 11월 초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신광면 소재지인 계천리 계월마을과 함평읍 석성리 주포에 진주하여 경찰고지를 설치한 후 인근 손불면과 신광면에 대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함평경찰은 1950년 12월 1일 경상남도경찰국에서 전입한 600여 명의 경찰 중 100여 명을 배치 받아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였다. 12월 12일에는 손불면 북성리, 신광면 송사리 등 군유산과 인접한 일부를 제외한 전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함평경찰서 근무자 김씨(김균배)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12일 작전은 현지 경찰과 경상도에서 온 해병대 기동대가 했는데, 주포사건은 반란군의 주포 점령 소식을 듣고 석창리 주민이 밥을 가지고 주포지서로 가다가 경찰을 반란군으로 착각하여 “동무”라고 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1951년 2월 19일 함평경찰은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 지원 아래 영광경찰서와 합동으로 ‘군유산지역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날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에서 출발한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신광면 함정리에서 군유산에 총격을 가하면서 보여리를 거쳐 군유산으로 올라갔고, 함평읍 주포에서 출발한 함평경찰서 기동대도 손불면 소재지인 대전리, 월천리를 지나면서 군유산에 공격을 가하였다. 또한 영광군 군남면 방향에서 올라왔던 영광경찰서 기동대는 영광군 염산면 방향으로 퇴로를 열어주며 군유산에 진출하였다. 경찰은 수복지역 주민을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 등으로 소개시켰는데 소개민들이 경찰고지에 나와 신고하도록 하여 군유산 입산자와의 연계를 차단하면서 주민을 연행․조사하는 등 통제도 강화하였다. 미수복지역에서 소개 나온 주민들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자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에 나간 후 살해된 경우가 있었다.

경찰의 토벌작전을 피해 군유산으로 피신했던 손불면 북성리 황장술 등은 1951년 2월 22일 집에서 경찰에게 사살당했다. 같은 마을 이봉장은 2월 27일 손불지서에 갔다가 지서에서 살해당했다. 손불면 월천리 박윤휴 등 14명은 1950년 2월 22일 ‘산당고랑’에서 사살당했다. 손불면 산남리, 죽장리 주민들도 희생되었다. 함평경찰서 의용경찰대였던 임씨(임봉섭)에 의하면, 군유산작전은 함평경찰서와 영광경찰서 기동대에 전남경찰국 기동대까지 참여하였는데, 본국 기동대는 1개 대대 병력이 300~400명인데 최소 150명 이상이 군유산 작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당시 군유산은 민간인들로 꽉 찼는데 함평경찰은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전을 하니 민간인을 산 고랑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9. 21.~22.

선암정 등

28

경찰유격대

보도연맹

1950. 7. 13.

신안 비금면 앞바다

5사단

갑종 목포형무소

보도연맹

1950. 7. 21.

학교면 얼음재

함평경찰서

을종

보도연맹

1950. 7. 23.

나산면 넙태

219

함평경찰서

병종

폭격

1950. 8. 6.

신광면 장터

2

미군

토벌

1950. 10. 22.

학교면, 대동면

34

11사단

토벌

1950. 10. 23.

함평읍 수호리

16

11사단

토벌

1950. 10. 28.

나산면 월봉리

8

11사단

토벌

1950. 11. 27.

월야면 외치리

7

11사단

토벌

1950. 12. 6.

월야면 정산리 등

34

11사단

토벌

1950. 12. 7.

월야면 월야리

85

11사단

토벌

1950. 12. 9.

월야면 외치리

20

11사단

토벌

1950. 12. 23.

해보면 상곡리

3~4

11사단

토벌

1950. 12. 31.

해보면 대창리

23

11사단

토벌

1951. 1. 12.

해보면 상곡리

50

11사단

토벌

1951. 1. 14.

나산면 우치리

20

11사단

토벌

1951. 2. 22.~27.

손불면 군유산

20

경찰토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