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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진도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3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726

<전쟁 전 피해>

 

1945년 8월 해방 직후 열린 진도 군민대회에서 결성된 ‘진도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을 담당하는 청년부를 두는 등 행정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9월 초에는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개편대회 등의 영향으로 9월 중순 진도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진도인민위원회는 건준에서 활동하던 좌우익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한 가운데 출범하였다. 이로 인해 진도인민위원회는 내부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며 11월부터 실시된 미군정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미군정은 진도인민위원회가 온건하고 능률적이며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음을 알고 인민위원회에서 선출한 군수를 그대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46년 초에 접어들면서부터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전남도경 특경대가 진도에 진주하였으며, 이들이 인민위원회의 경찰력을 대체하였다. 1946년 2월에는 군수와 면장이 모두 교체되었다. 이에 대해 인민위원회 활동인사를 중심으로 미군정의 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저항이 있었으나 3월 이후부터 그 위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결국 인민위원회 활동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여 활동을 하다가 좌익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생사불명이 되기도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진도경찰서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7월 17일 진도군내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진도군지』에 의하면 진도 보도연맹원 10여 명이 경비정 ‘진도환’에 실려 서쪽바다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고군면 오산리 조씨는 예비검속 된 주민들을 고자골 앞 바다(군내면 해창리)에 돌을 달아 수장시켰다고 증언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이창규가 후퇴하던 진도경찰에 의해 진도군 인근 바다에 수장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외에도 해창리 박병후, 노행문, 박기바 등의 희생사실에 대한 증언이 있으며,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희생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았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자 진도지역에 복귀한 진도경찰서는 1950년 11월 10일 연행한 주민들을 벽파부두 부근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군내면에서 양복점을 하던 분토리 박옥배인데, 그는 용장리 인민재판에 참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함께 희생된 다른 주민들에 대해서는 조사되지 않았다.

진도경찰서 외에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도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고군지서는 1950년 11월 연행한 주민 30여 명을 지망리 절골짜기와 의신면 창포리 하천가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사실은 오산리 조병하가 고군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일 2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지망리 절 골짜기에서 희생된 사실, 석현리 김영대가 4~5명의 주민들과 함께 1950년 11월 14일 창포리 하천가에서 총살당한 사실 때문에 알려졌다. 희생자 조병하는 독립운동가로서 1934년 진도적색농민조합 오산리 지구위원회 대표로 활동하면서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00일간 목포형무소에서 구류를 살기도 했다.

군내지서는 연행한 주민들을 송산리 잿등, 작두도 바다, 고작골 등에서 학살했다. 전쟁 전 군내면사무소 재무계장이었던 분토리 박운배가 군내지서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월 14일 송산리 잿등에서 희생당했다. 10월 19일에는 지서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던 중 안인제가 사망했으며 안인제의 장인 박규홍은 11월 29일 군내지서 부근 고작골에서 총살당했다. 위 안인제와 박규홍은 전쟁 당시 후퇴하던 경찰에 의해 희생된 박병후의 가족들이다. 10월 21일 군내지서는 둔전리 이동률 등 30여 명의 주민들을 ‘조도호’에 싣고 나간 후 작두도 바다에서 수장했다. 선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징발하여 동소포항에 대기시키던 ‘조도호’에 포승줄에 묶인 30여 명의 주민들을 싣고 작두도와 저도 사이의 바다에서 선원들을 한 쪽으로 가라고 한 후 묶인 주민들을 뱃머리에서 떨어뜨리고 총을 쐈다. 이외에 진도의 항일운동가 곽재술의 동생인 군내면 세등리 곽재헌은 곽재술이 월북하자 자주 경찰서로 연행되곤 했는데, 국군 수복 후 경찰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곽재헌의 친척 곽재현은 국군 수복 후 고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0월 24일 오산리 저수지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임회지서는 부역혐의를 받던 청년들을 연행하여 지서 옆 창고에 감금하였다. 당시 생존했던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밤마다 20여 명이 끌려 나가 일제시대 신사가 있던 자리 부근인 석교리 수장동 밭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임회면 연동리 박생배였는데, 그는 전쟁 전 총살당한 박월암의 동생으로, 국군 수복 후 인민군 점령기 자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1950년 11월 15일 희생되었다. 당시 지서에 감금되었던 100여 명의 주민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7.

진도 바다

진도경찰서

부역

1950. 11. 10.

벽파부두

진도경찰서

부역

1950. 11. 1.~14.

지망리 절골짜기 등

30

고군지서

부역

1950.10.14.~11.29.

석교리 수장동

100

임회지서

부역

1950.10.~11.

송산리 잿등 등

30

군내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