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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장흥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30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767

<전쟁 전 피해>

 

장흥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1월 5일 장흥 관산지서 소속 경찰들이 농안리 손돈태 가족들을 마을 우물가로 끌어냈다. 경찰은 손돈태에게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도피중인 아들 손천석을, 손금태에게는 14연대에 근무하던 중 여순사건 때 행방불명된 큰아들 손용반을 찾아내라며 총 개머리판 등으로 무차별 구타를 하였다. 손돈태의 처 등이 이에 항의를 하자 이부접 등 세 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살하였다. 그 후 손일태의 집으로 가서 손일태 등 6명을 사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장흥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7월 22일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 바다에 두 사람씩 손이 묶인 채 빠뜨려진 후 사살되었고 또 다른 주민들은 안양면 해창저수지 인근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전남일보사의 『광복 30년』에 의하면, 후퇴하던 장흥경찰이 주민 30여 명을 안양면 앞 바다에 수장시켰다.

 

<토벌 피해>

 

인민군은 7월 28일 장흥에 진입하여(장흥군지) 9월 28일 철수했다고 한다. 경찰이 장흥읍을 수복한 시기는 9월 30일(또는 10월 5일)이었다. 국군 수복 후 장흥에는 유치면 보림사계곡으로 피신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경찰토벌작전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사실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경찰서와 각 지서에 의해서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확인된 피해 사실은 장흥경찰서, 대덕지서, 장평지서, 안양지서에 의한 것이다.

 

장흥에서는 국군 수복 후 경찰이 젊은 사람들을 이웃 마을로 소개시켜 노인들만 남아있던 장평면 제산리 이목마을에 10월 26일 경찰토벌부대가 진입하였다. 경찰이 이목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자 들판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이 놀라 마을로 돌아왔다. 경찰은 이들을 집결시킨 후 빨치산과 내통하기 위해 마을로 왔다면서 장도수 등 7명을 연행하여 그 중 6명을 마을 앞 냇가에서 사살하였다. 경찰에게 연행된 다른 주민 한명도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다음 날인 1950년 10월 27일 장흥경찰서 소속 기동대 20~30명이 부용산자락 마을인 용산면 운주리에 진입하였다. 기동대는 2개조로 나누어 1개조는 마을 앞산을 수색하고, 또 다른 1개조는 마을의 집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마을사람들을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 집결시킨 후 마을사람 개개인을 조사한 후 이광준 등 7명의 양 손을 묶어 트럭에 싣고 가다가 이중 5명을 용산면과 관산면 사이 솔티재에서 학살했다.

1950년 11월 1일 경찰토벌대가 천태산 정상에서부터 대덕면 연정리 산정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사람들은 무조건 피신을 했으나 박일규 등 3명이 수색 중인 경찰에게 붙잡혀 마을로 끌려왔다. 마을로 내려온 경찰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화장실에 숨어있던 주민 1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고, 마을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마을회관 앞으로 데려왔다. 경찰은 마을사람 모두를 마을회관 앞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 2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산에서 잡힌 약산면 피난민 3명과 주민 4명을 마을 앞 대나무밭에서 사살했다.

1950년 11월 27일 경찰 토벌대가 다시 장평면에 진입하였다. 청용리에 경찰이 온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 젊은이들이 1km 떨어진 이웃 하동마을로 피신했다. 그러자 그날 밤 경찰 토벌대가 하동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청용마을에서 피신해 온 주민들과 하동마을 주민 등 7~8명이 사살당했다. 다음날 새벽 경찰 토벌대는 청용마을에 와서 마을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을 끌어가는 과정에서 경찰 토벌대는 마을주민 한 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다른 주민 4명을 연행했다. 경찰 토벌대는 이들을 연행하던 중 남자 1명을 마을 어귀에서, 또 다른 남자 1명을 생판리 고개에서 사살했다. 장평지서까지 끌려갔던 2명의 여성은 다음날 풀려났다.

 

<부역혐의 피해>

 

장흥경찰서는 유치장에 감금한 주민들을 1950년 12월 4일 장흥읍 남외리(장흥서초등학교 부근) 다리 밑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는 주민은 부동면 평화리 고재갑이며 함께 희생된 주민들의 규모와 신원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대덕지서는 1951년 3월 15일 옹암리 박종신 등 마을 주민 5명을 내저마을 고개에서 총살했다. 희생자들은 경찰이 지정한 초소에 야경을 서기 위해 나갔다가 연행된 것이었는데, 박은수를 제외한 5명이 내저마을 고개 논에서 사살되고 박은수는 풀려났다. 이들이 희생된 이유는 국군 수복 당시 약산면의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장평지서는 1950년 10월 26일 옹기를 팔러 장에 가던 등촌리 김임식을 덕산고개에서 사살했으며, 1951년 3월 17일에는 두봉리에서 지내다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이 있던 진산리로 양식과 무우를 가지러 가던 주민 2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안양지서는 1950년 12월 21일 안양면 모령리 방대석을 연행하여 목단마을 가둥골에서 총살했다. 당시 모령리에서는 5~6명이 경찰에게 희생당했다.

 

유치토벌작전 중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영암경찰서 경찰 ‘금오대’ 대장 정씨(정국채)에 의하면, 장흥 유치 작전 때 몇 개 군이 합동작전을 하는 경우에는 애매하게 죽는 민간인이 많았는데, 작전 중 도망가는 사람은 모두 공비로 보았다고 한다. 국군 수복 당시 ‘경찰이 수복할 경우 인민군 점령하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모두 죽인다.’라는 소문을 들은 완도군 주민들은 일단 육지로 피하자는 생각으로 가장 가까이 깊은 계곡이 있던 장흥 유치면 보림사 계곡으로 피난하였다. 1951년 봄 경찰토벌대가 작전을 하면서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학살했다. 보림사 계곡 동굴에 있던 피난민들은 토벌대가 난사한 총격에 집단희생되었다. 이 사실은 현장에서 생존한 최남기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완도에서 장흥 유치계곡으로 피난했던 희생자 대부분에 대해 진실규명 불능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사』에서 장흥경찰서는 1950년 10월 18일 강진경찰서를 습격하려던 300여 명을 공격하여 42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50. 1. 5.

관산면

9

관산지서

보도연맹

1950. 7. 22.

안양면 바다

30

장흥경찰서

토벌

1950. 10. 18.

42

장흥경찰서

토벌

1950. 10. 26.

장평면 제산리

7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0. 27.

용산면 솔티재

5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1. 1.

대덕면 연정리

10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1. 27.

장평면 청용리

10

경찰토벌대

부역

1950. 12. 4.

장흥읍 남외리 다리밑

장흥경찰서

부역

1950. 12. 21.

안양면 모령리

5~6

안양지서

부역

1951. 3. 15.

대덕면 옹암리

5

대덕지서

부역

1951. 3. 17.

장평면 진산리

2

장평지서

토벌

1951. 봄

보림사 계곡

경찰토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