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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장성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2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754

<전쟁 전 피해>

 

전쟁 전 장성에서는 경찰 토벌작전에 의해 주민피해가 발생했음이 확인된다. 장성경찰서 경찰토벌대는 1949년 12월 20일 강대석 등 9명 일가족을 사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장성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당시 4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장성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7월 7일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갈재정상, 7월 12일 장성군 북상면(현재 북하면) 신성리 남창골, 7월 18일 삼서면 홍정리 가막재골짜기, 7월 20일 장성읍 단광리 밤실재 인근 야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외에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나 장성군 북하면 성암리 원성암마을 인근 야산에서도 집단희생사건이 있었다. 장성경찰서 남면지서 근무자 김씨(김재권)는 전쟁발발 후 남면지서에서 보도연맹원 30여 명을 트럭에 태워 장성경찰서로 이송시켰으며, 갈재정상 양쪽에 시신들이 무더기로 싸여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에 장성지역의 주민들도 희생된 사건이 확인되었는데, 장성 삼계면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수십 명이 1950년 9월 중순 삼계면 사창리 목침재(담양재)에서 집단희생되었다.

 

<11사단 사건>

 

인민군 후퇴 후 장성지역에 경찰이 복귀하여 부역혐의자에 대한 색출이 시작되었으며 본격적인 민간인 피해는 11사단의 주둔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남지역에 배치된 20연대 중 장성을 담당한 부대는 2대대로서 광주에 주둔했다가 10월 19일 장성으로 진주하였다. 이 날 국군이 진원면 학전리에 진입하자 대부분 주민들이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군인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총살당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장성읍에 진입한 2대대는 주민들을 연행하여 장성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중 60여 명이 성산리 꽃뫼에서 학살당했다. 장성읍과 황룡면, 동화면을 통과하던 2대대는 10월 31일 삼계면에 진주하여 피신하던 주민들을 추격하여 사살했다.

2대대는 11월에 들어 북상면, 북일면, 북이면 등 장성 북쪽 지역에 진입하였다. 11월 말 북상면에 진입한 7중대는 신성리 남창마을과 자장마을에 들어와 남아있던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산으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남자들의 행방을 말하라며 임산부가 포함된 젊은 여성 4명을 끌어내 학살했다. 12월 7일 2대대는 북상면 용곡리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켜놓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군인들은 모은 주민들을 장성읍 봉덕리로 끌고 가던 중 청년 20여 명을 제외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 살림을 챙겨오게 하였다. 이들이 떠난 사이 군인들은 남아 있던 청년들을 살해했다.

장성에 주둔했던 2대대는 작전도 아니었고 부역자 색출과정과도 전혀 상관없이 주민들을 끌고 가 희생시킨 사례가 많았다. 북이면 사거리에 주둔하던 7중대는 1950년 11월 11일 전사한 국군 2명의 시신을 이송하던 북일면 박산리 작동마을 주민 8명을 북이지서로 끌고 갔으며, 11월 21일에도 북이면 만무리 주민 2명을 북이지서로 끌고 갔다. 12월 4일에도 주둔지인 북이지서로 북상면 쌍웅리 하웅마을 주민 4명이 국군의 부식으로 쓸 소를 몰고 갔다. 지서로 갔던 주민들은 모두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12월 7일 삼계면 상도리에 총과 포를 쏘면서 진입한 2대대가 마을을 소각하였으며 산속에 숨어있던 주민 4명을 잡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 21가구 중 18가구가 소실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불에 타지 않고 남은 집에서 거주하던 중 12월 16일 다시 2명이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상도리 주민들이 공격을 당하던 때, 2대대는 발산리에도 진입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눈에 띄는 주민에게 총을 쏴 주민 1명을 사살했다. 군인들이 떠나자 피신했던 주민들이 돌아와 남아 있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인 12월 8일 다시 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은 도망치던 주민들을 추격하여 사살하거나 연행하였다. 연행된 주민들 중 30여 명의 청년들이 모두 총살당했다. 며칠 뒤인 12월 13일 살아남은 주민 중 2명이 부역자라며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2대대의 학살은 삼서면에서도 확인된다. 1950년 12월 10일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태매산에서 한실마을 주민들이 2대대 5중대에게 집단희생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희생당한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정악휴의 시신을 찾던 중 시체더미가 목격되어 알려졌다.

1951년에 들어서도 국군 11사단 학살사건은 줄어들지 않았다. 1951년 1월 상순에 2대대는 황룡면 통안리에 진입하여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불에 타다 만 4채의 집에 모여 힘겹게 생활하고 있었다. 1월 27일 다시 마을에 들어 온 2대대는 거동할 수 있는 주민 80여 명을 모두 끌고 가 한갓등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에 이르자 군인들은 한 줄씩 총살했다.

1951년 1월 30일 2대대는 삼서면 학성리 원촌마을과 희생마을에 진입하였다. 당시 청장년이 모두 피신한 상태여서 마을에는 노인과 어린이들만 남아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을 소각했고 인근 산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을 찾아내 사살했으며 일부 주민들을 삼서지서로 연행했다. 2월 18일에는 불갑산으로 이동하던 2대대가 마을에 살고 있던 삼서면 학성리 회성마을 노인들을 끌고 가 살해했다.

11사단이 토벌작전을 벌이던 시기에 장성경찰서는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여 조사한 후 정당한 절차 없이 집단학살했거나 경찰토벌대를 조직하여 별도의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주민들을 학살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장성경찰서가 복귀하자 사찰계를 중심으로 장성읍 단광리 김일주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서 유치장 등으로 연행되었다가 1950년 11월 20일 단광리 가작동 어더기에서 총살당했다.

1951년 1월 3일에는 장성읍 봉덕리 주민들을 성산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유치장에 감금했다가 북상면 덕재고개 등에서 총살했다. 장성읍 봉덕리 산간마을에서 거주하던 서귀생 등 주민들은 1951년 12월말 수복한 경찰토벌대의 명령으로 성산읍 주민들과 함께 성산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였다. 경찰토벌대는 군경 유가족(인민군 점령기 피해를 입은 유가족)을 시켜 성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주민 중 부역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지목하게 하였고, 지목된 서귀생 등은 장성경찰서에 5일간 수용되었다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서귀생의 가족들은 사살 장소로⃇알려진 북상면 덕재고개와 참나무밭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들을 발견하였으나, 시신들은 얼굴 부위에 총을 맞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워 수습하지 못하였다.

1951년 1월 26일 장성경찰서 기동 1중대와 서삼지서 토벌대원이 임곡과 덕산마을 사람들을 모두 당산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들은 당산에 모인 사람들 중 어린아이와 아낙네를 제외한 장년의 남자 18명을 골라내어 당산에서 300m 떨어진 임곡천변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삼서면에서는 1951년 3월 10일 삼서면 보생리 나덕주 등이 경찰 토벌대에게 연행되어 보생리 야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삼서와 삼계지역은 1950년 12월 중순경 수복되어 이때부터 2~3개월에 걸쳐 공비토벌작전과 부역자 색출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초순, 경찰토벌대의 토끼몰이식 포위로 인해 인근마을로 피난 가던 주민들과 나덕주의 일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나덕주의 아내는 경찰토벌대를 피하다 인근 삼계면에서 붙잡혀 사창국민학교에 수용되었고, 다른 식구들은 경찰 토벌대를 피해 낮에는 산속에 은신하다가 밤에는 마을로 내려와 생활하였다. 경찰토벌대는 1951년 3월 10일 나덕주와 동생 나백주도 함께 검거하여 인근 보생리 야산에서 삼서면 주민들과 함께 집단 사살하였다.

각 지서 역시 별도의 토벌부대를 운영하면서 주민들을 연행하여 집단학살했다.

북일지서는 1950년 11월 24일경 북일면 신흥리 박현옥 등 주민 10여 명을 연행한 후 지서 뒤편 공터에서 총살했다. 국군 수복 직후, 북일면 산간마을이 모두 소각되자 산간마을 주민들은 지서나 면소재지 부근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950년 11월 말 박현옥 형제도 북일면 오산리 마을이 소각되자 마을사람들과 함께 소개되어 면소재지 신흥리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피난생활을 하자마자 면소재지를 순찰 중이던 북일지서 토벌대원에게 검거되었다. 동생 박현선은 때마침 지서에 있던 장성 국회의원 변진갑의 보증으로 풀려났으나, 박현옥과 다른 주민 10여 명은 11월 24일경 지서 뒤편에 있는 작은 산 공터에서 집단 사살되었다.

동화지서는 정기철 등 주민들을 감금했다가 1950년 12월 총살했다. 정기철의 일가족 8명은 12월 26일 희생되었다.

삼계지서는 사창리 강판례 등 지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을 1951년 5월 삼계면 목침재에서 총살했다.

북이지서는 1951년 4월 25일 우익인사들을 동원하여 고창읍에서 김종옥의 아들 김상홍을 끌고 갔는데, 그 후 3명 모두 실종되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12. 20.

9

경찰토벌대

보도연맹

1950. 7. 7.~20.

원덕리 갈재정상

400

장성경찰서

인공

1950. 9.중순

삼계면 담양재

수십

삼계면분주소

토벌

1950. 10. 19.~20.

성산리 꽃뫼 등

60

11사단

토벌

1950. 11.말

신성리

4

11사단

부역

1950. 11. 20.

장성읍 단광리 가장동

10

장성경찰서

부역

1950. 11. 24.

지서 뒤 공터

10

북일지서

토벌

1950. 11.~12.

북이지서

14

11사단

토벌

1950. 12. 7.

장성읍 봉덕리

20

11사단

토벌

1950. 12. 7.~16.

삼계면 상도리, 발산리

30

11사단

토벌

1950. 12. 10.

삼서면 대곡리

11사단

부역

1950. 12. 26.

동화지서

8

동화지서

토벌

1951. 1. 26.

임곡천변

18

경찰토벌대

토벌

1951. 1. 27.

황룡면 한갓등

80

11사단

토벌

1951. 1. 30.

삼서면 학성리

11사단

토벌

1951. 3. 10.

삼서면 보생리

경찰토벌대

부역

1951. 4. 25.

3

북이지서

부역

1951. 5.

삼계면 목침재

삼계지서